[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3> {{{#f9da16 {{{+1 '''작센 선제후국'''}}}[br]'''Kurfürstentum Sachsen'''}}} || ||<-2> [[파일:작센 선제후국 국기.svg|width=100%]] || [[파일:작센 선제후국 국장.svg|width=80%]] || ||<-2> {{{#f9da16 '''국기'''}}} || {{{#f9da16 '''국장'''}}} || ||<-3> {{{#f9da16 '''위치'''}}} || ||<-3> [[파일:Electorate_of_Saxony_1789.png|width=100%]] || ||<-3> [[1356년|{{{#f9da16 '''1356년'''}}}]] {{{#f9da16 '''~'''}}} [[1806년|{{{#f9da16 '''1806년'''}}}]] || ||<-3> {{{#f9da16 '''역사'''}}} || ||<-2> {{{#f9da16 '''성립 이전'''}}} || {{{#f9da16 '''멸망 이후'''}}} || ||<-2> [[작센비텐베르크 공국|{{{#f9da16 '''작센비텐베르크 공국'''}}}]] || [[작센 왕국|'''{{{#fff 작센 왕국}}}''']] || ||<-3> '''지리''' || || '''위치''' ||<-2>[[독일]] [[작센]] || || '''수도''' ||<-2>[[비텐베르크]](1356~1547)[br][[드레스덴]](1547~1806) || ||<-3> '''인문환경''' || || '''인구''' ||<-2>약 1,100,000명 (1800년) || || '''언어''' ||<-2>[[라틴어]], [[독일어]] || || '''종교''' ||<-2>루터파 [[개신교]], [[가톨릭]]|| || '''민족''' ||<-2>[[독일인]] || ||<-3> '''정치''' || || '''정치체제''' ||<-2>[[봉건군주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2>[[선제후]] || || '''국성''' ||<-2>[[아스카니아 가문]] → [[베틴 가문]] || || '''주요 선제후''' ||<-2>[[루돌프 1세(작센)|루돌프 1세]](1356)[br][[알브레히트 3세(작센)|알브레히트 3세]](1419~1422)[br][[프리드리히 1세(작센)|프리드리히 1세]](1423~1428)[br][[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1486~1525)[br][[아우구스트 2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1694~1733)[br][[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1763~1806) || [목차] [clearfix] == 개요 == 작센 선제후국([[독일어]]: Kurfürstentum Sachsen, 또한 Kursachsen)은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금인칙서#s-2.8|1356년 금인칙서]]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4세]]로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이다. == 역사 == 성립 당시에는 [[비텐베르크]] 일대의 오늘날 [[작센안할트]] 지역만 소유하고 있었으나, 1423년 아스카니아 가문이 단절되자 카를 4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베틴 가문]]의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작센 선제후직을 수여하면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작센)|프리드리히 1세]]가 된 프리드리히 4세는 작센의 중심지를 [[엘베강]] 상류의 비텐베르크에서 베틴 가문의 중심지였던 마이센 변경백국(Markgrafschaft Meißen)으로 옮겼고 이로서 과거에는 [[마이센(독일)|마이센]](Meißen)이라 불리던 지역이 [[작센]]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작센)|프리드리히 2세]]는 [[튀링겐]] 변경백국(Landgrafschaft von Thüringen)까지 상속받아 분할되었던 베틴 가문의 영지를 통합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작센 선제후국을 물려받은 맏아들 에른스트는 동생 알브레히트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라이프치히]] 분할 조약을 맺어 [[비텐베르크]] 일대와 [[튀링겐]], 작센 선제후 직위(Kurfürst von Sachsen)는 자신이 가져갔고, 마이센 일대는 알브레히트에게 주어 작센 공작(Herzog von Sachsen)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에른스트의 맏아들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작센 선제후국은 독일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패배하여 카를 5세의 편에 선 알브레히트의 손자인 6촌 작센-마이센의 모리츠에게 작센 선제후 직위와 영지 대부분을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목숨만 부지했고 1547년을 기점으로 알브레히트계가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계가 작센 공작이 되었다. 이 교환은 1567년 최종 승인되어 알브레히트계가 확고한 작센 선제후직을 차지했다. 17세기 중반까지도 작센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루터파]] 국가의 맹주였으나 점차 이웃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 통념과 달리 [[프로이센 공국]]에서는 이름만 가져왔고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는 [[베를린]]이 있는 [[브란덴부르크]]였다.]에게 우위를 내주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트 2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이웃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거에 참전해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아들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를 패배시키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가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게 패퇴하여 국력 대부분을 소모했고,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루터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귀족 및 백성들의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후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계는 계속 가톨릭 신앙을 유지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기 전까지 루터파 세력의 대표를 가톨릭 제후가 맡는 모순이 이어졌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 왕국]]으로 승격시켰다.[[https://ko.m.wikipedia.org/wiki/%ED%8C%8C%EC%9D%BC:Electoral_Saxony.png|링크]] == 역대 선제후 == [include(틀:역대 작센 선제후)] * [[아스카니아 가문]] * [[루돌프 1세(작센)|루돌프 1세]] * [[루돌프 2세(작센)|루돌프 2세]] * [[벤첼(작센)|벤첼]] * [[루돌프 3세(작센)|루돌프 3세]] * [[알브레히트 3세(작센 선제후)|알브레히트 3세]] * [[베틴 가문]] * [[프리드리히 1세(작센)|프리드리히 1세]] * [[프리드리히 2세(작센)|프리드리히 2세]] * [[에른스트(작센)|에른스트]] *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 * [[요한(1468)|요한]] * [[요한 프리드리히 1세]] * [[모리츠(작센)|모리츠]] * [[아우구스트(작센)|아우구스트]] * [[크리스티안 1세(작센)|크리스티안 1세]] * [[크리스티안 2세(작센)|크리스티안 2세]] * [[요한 게오르크 1세]] * [[요한 게오르크 2세]] * [[요한 게오르크 3세]] * [[요한 게오르크 4세]] * [[아우구스트 2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 [[아우구스트 3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 여담 == 작센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렵장관(Lord High Masters of the Chase)'을 겸했다고 한다. 그래서 요한 게오르크 1세는 [[붉은사슴]]만도 35,421마리를 사냥했고, 아들 요한 게오르크 2세는 아버지보다 더 많은 42,649마리나 사냥했다. 요한 게오르크 2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거부한 것도 보헤미아 수사슴이 작센 수사슴보다 작아서였다고 한다. [[분류:기독교 국가]][[분류:독일 왕국 구성 제후국]][[분류:선제후국]][[분류:19세기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