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신라의 인물]][[분류:신라의 승려]][[분류:590년 출생]][[분류:658년 사망]] [include(틀:신라십성)]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도사 자장율사 진영 문화재청.jpg|width=100%]]}}}|| || 통도사에 있는 자장율사 진영(초상화) || [목차] == 개요 == {{{+1 慈藏}}} (590년 ~ 658년) [[신라]]의 [[승려]]. [[신라십성]](新羅十聖)에 속하는 인물이다. 보통 [[법명]]에 경칭인 율사(律師)[* 불교의 계율에서 높은 경지를 이룩한 승려에게 붙이는 존칭. 비슷하게 참선을 주로 한 승려에게는 선사(禪師), 경전과 교리 지식으로 이름 높은 승려에게는 강사(講師)나 강백(講伯), 부처의 가르침에 정통하고 교법(敎法)의 스승이 되는 승려는 법사(法師)나 법주(法主)라고도 한다.]를 더한 자장율사(慈藏律師)나 혹은 법사(法師)를 더해 자장법사(慈藏法師)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원효]]ㆍ[[의상(신라)|의상]]ㆍ[[도선]]과 더불어 [[대한민국]] 각지 오래된 사찰의 창건자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승려이다. [[통도사]]처럼 신라 시대 유물이나 확실한 1차 사료가 남아 정말로 자장이 창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찰의 역사나 정통성, 권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허구이다. 자장이 참으로 하나하나 창건했다기엔 전국에 그렇게 주장하는 절의 숫자가 너무 많다. == 생애 == [[골품제]]상 [[진골]] 출신으로 김무림(金茂林)[* 그의 이름은 호림(虎林), 호림공(虎林公)으로도 기록되어 있다.]의 아들이며 속세의 본명은 김선종랑(金善宗郞)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장의 부모님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고민이었는데 어느날 김무림이 [[관세음보살]] 앞에서 자식이 생기기를 빌며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출가시켜 [[불교]]에 귀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발원하자 그날 자장의 어머니가 품속으로 [[별]]이 날아드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고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의자 자장은 전 [[재산]]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세운 뒤 출가했다. [[선덕여왕]]은 깊은 산에서 수행 중이던 자장에게 태보(台輔) [[관직]]에 오를 것을 종용하고 이를 듣지 않고 출가하면 [[참수형|목을 베겠다]]고까지 위협[* 삼국유사에서 재상으로 데려오고 '안 오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하는 왕을 상대로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를 어기고 살고자 하지 않는다."하며 꼿꼿한 자세로 일관한 이야기가 그 예.]했지만 자장의 의지가 확고해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했다고 기술했다.[* [[주보돈]] 교수는 자장의 가문이 전형적인 왕권파로서 선덕여왕을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자장의 출가를 선덕여왕이 강경하게 반대한 것도 [[비담]]으로 대표되는 반여왕파 [[귀족]]들의 위협을 받는 형편에서 자장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으로 판단했는데 자장이 출가 이후에도 선덕여왕을 계속 지원하므로 출가는 하되 선덕여왕을 돕기로 하지 않았나 추정했다. 현실적인 시선에서 보면 선덕여왕보다 진평왕일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 5년(636)에 왕명으로 제자 승실 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섬서성]] 종남산에 있는 운제사에서 3년 동안 수도했다. 이후 [[우타이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을 만나 "너희 나라에 외적의 침입이 많은 이유는 여자가 왕이라서 그렇다. 고국에 돌아가서 [[절(불교)|절]]을 창건하면 [[부처님]]이 [[국가]]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으며 석가모니의 정골[[사리(불교)|사리]]와 [[가사]] 등을 받고 이후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웠지만 선덕여왕이 [[귀국]]을 요청하여 선덕여왕 12년(643)에 장경 1부와 불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귀국 후 신라 최고 승직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었고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서 불교를 확고한 통치 이념으로서 국력의 신장과 국론 통일을 꾀했고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했다. 이 때 [[서라벌]] [[황룡사]][* 절의 창건은 [[진흥왕]] 때 했고 이 때는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해 황룡사를 완성한 것이다.]의 [[황룡사 9층 목탑]]도 건설하는데 탑의 층마다 신라가 앞으로 물리쳐야 할 [[오랑캐]]의 이름을 정하였다. 이외에도 불보사찰 [[통도사]] 등을 창건했는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우고 중국 우타이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았다는 정골사리를 안치했다고 한다. [[진덕여왕]] 3년(649)에는 신라 조정의 복식 제도를 당나라의 제도와 같게 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당나라의 '영휘' [[연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당나라풍 의복 수용을 건의한 것이 [[삼국사기]]에는 [[김춘추]]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도 "김춘추는 당에 아첨해서 고유의 의복을 버리고 당의 의복을 입었다."라고 삼국사기와 똑같은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가 원래 불교 편향적인 성격이 강한 기록이라서 [[조선]]의 수도를 정할 때 [[무학대사]]가 정했다고 하는 야사의 기록과 [[태조(조선)|태조]] 자신이 [[한양]]으로 정하자고 했다는 정사 기록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하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말년에 초라한 [[거지]] 행세를 한 채 그를 만나러 온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자를 시켜 박대하자 문수보살이 "아상[* 我相. 불교 용어로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고 믿고 집착하거나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뜻한다. [[나르시시즘]]과 유사한 의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꾸짖은 뒤 죽은 [[강아지]]로 둔갑시켰던 사자보좌(獅子寶座)를 타고[* 불교에서는 [[사자]]를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기기 때문에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자장을 찾아온 거지가 사자를 타고 떠났다는 데서 문수보살임을 짐작할 수 있다.] 광채를 발하며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시자로부터 광경을 전해 들은 자장은 거지 노인이 문수보살의 현현임을 깨닫고는 빛을 쫓아 남쪽 고개에 올랐지만 따라갈 수 없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성인과 만났건만 자신의 아상 때문에 무산됐음을 탓하다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아마 자장의 후원자인 [[선덕여왕]]이 사망한 뒤, 새로운 권력자가 된 [[김춘추]]ㆍ[[김유신]] 세력과 갈등하다가 밀려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 설화가 된 듯하다. 자장이 물러난 후 김춘추의 후원을 받는 [[의상(신라)|의상]]과 [[원효]]가 신라 불교계의 실권자가 되었다.] == 기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도사 자장율사 친착가사.jpg|width=100%]]}}}|| || 통도사 자장율사 친착가사 || 자장이 [[통도사]]를 창건할 때 입었다는 가사가 통도사에 남아있다. 1년에 딱 한 번 개산대재 무렵, 일반에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