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송 황후)] ||<-2><:>{{{#!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5829 0%, #2e8b57 20%, #2e8b57 80%, #005829)" '''{{{#ece5b6 남송의 황후}}}[br]{{{+1 {{{#ece5b6 慈懿皇后 | 자의황후}}}}}}'''}}} || ||<-2><#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자의황후.jpg|width=100%]]}}} || || '''[[시호|{{{#ece5b6 시호}}}]]''' ||<(> 자의황후(慈懿皇后) || || '''[[성씨|{{{#ece5b6 성}}}]]''' ||<(> 이(李) || || '''[[휘|{{{#ece5b6 휘}}}]]''' ||<(> 봉랑(鳳娘) || || '''{{{#ece5b6 출생}}}''' ||<(> 1144년 || || '''{{{#ece5b6 사망}}}''' ||<(> 1200년 || ||<|4> '''{{{#ece5b6 재위}}}''' ||<:> '''{{{#fff 남송의 황후}}}''' || ||<:> 1189년 ~ 1194년 || ||<:> '''{{{#fff 남송의 태상황후}}}''' || ||<:> 1194년 ~ 1200년 || || '''{{{#ece5b6 배우자}}}''' ||<(> [[광종(송)|광종]](光宗) || || '''{{{#ece5b6 아버지}}}''' ||<(> 이도(李道)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송]]시대의 황후로, 12대 황제였던 [[광종(송)|광종]]의 황후이자, 13대 황제였던 [[영종(송, 13대)|영종]]의 모후이다. == 생애 == === 황후의 출생과 입궁 === 1144년에 경원군 절도사를 지낸 이도(李道)의 딸로 태어났다. 처음 황후가 태어날 때, 문 밖에 검은 봉새가 있는 모습을 보고, 딸의 이름을 이봉랑(李鳳娘)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도는 호북에 있을 때, 관상을 잘 본다는 황보탄의 소문을 듣고, 황보탄에게 이봉랑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황보탄은 이봉랑에게 천하의 어머니가 될 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봉랑의 관상을 본 황보탄이 [[고종(송)|고종]]에게 이봉랑에 대해 이야기하여, 이봉랑은 궁에 입궁한다. [[효종(송)|효종]]이 즉위하고, 태상황이었던 고종의 추천을 통해 이봉랑은 효종의 아들인 공왕 조돈의 왕비로 들어가, 영국부인이 되고 정국부인으로 진봉되었다. 이봉랑은 1168년에 조돈과의 사이에서 가왕 조확을 낳았고, 1171년에 조돈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황태자비가 되었다. === 표독스러운 황후 === 조돈의 비가 된 이봉랑은 질투가 심한 성격이어서, 황후가 되기 이전에 당시 태상황이었던 고종과 황제인 효종 사이를 이간질하여 두 사람의 노여움을 샀다.[* 고종은 아예 태상황후였던 [[헌성자열황후]]에게 이봉랑을 간택한 황보탄을 잘못 믿은 것 같다고 하소연하기까지 했다. 한편 효종은 이봉랑에 대해 황태후를 모범으로 삼아서 행동하지 않으면 폐위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후 1187년에 고종이 죽고, 1189년에 효종이 황태자인 조돈에게 양위하면서 태상황이 되자, 이봉랑은 마침내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표독스러운 성격은 황후가 되면서도 계속 이어졌는데, 광종이 손을 씻을 때 광종의 시중을 든 궁녀의 손이 아름답다고 여기자 이봉랑이 궁녀의 손을 잘라 찬합에 넣어서 보낸 일화가 있었고, 광종이 총애하던 귀비 황씨를 광종이 궁을 비운 사이에 죽인 일도 있었다. 또한 이봉랑은 조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굳히기 위해, 자신이 낳은 가왕 조확을 태자로 세울 것을 태상황이었던 효종에게 간청하였으나, 효종이 불허하였다. 이때 이봉랑은 "첩이 직접 가왕 조확을 낳았는데, 어찌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며 효종에게 불만을 표시하여 효종의 화를 불렀다. 이봉랑은 끊임없이 효종과 광종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결국 효종과 광종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이처럼 이봉랑의 방자한 모습에 당시 태상황후였던 사씨가 예의범절을 중시하라고 권고하였지만, 이봉랑은 이를 무시하여 태상황후의 분노까지 불러왔다. 한때 광종의 황후였던 이봉랑을 폐위해야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1194년에 효종은 광종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효종이 사망한 이후에도 광종은 표독스러운 이황후에게 계속 휘둘렸고 결국 광종은 조정의 신망을 잃어갔다. === 광종의 퇴위와 죽음 === 이봉랑은 갈수록 교만해져서 광종을 대신해 국사를 처리했고, 200명이 넘는 친가의 친척들과 문객들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효종의 장례를 지내자는 가왕 조확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이봉랑에게 휘둘려 효종의 장례도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조정 대신이었던 [[조여우]], [[한탁주]] 등이 태황태후였던 [[헌성자열황후]]와의 논의 끝에 광종을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광종과 이봉랑의 소생이었던 가왕 조확을 대신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송나라의 제13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4대 황제인 [[영종(남송)|영종]]이었다. 태상황후가 된 이봉랑은 결국 경원 6년(1200년)에 사망하였고 자의황후(慈懿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후에 얼마나 밉보였는지 누구 하나 시신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사)] [[분류:송나라의 황후]][[분류:1144년 출생]][[분류:1200년 사망]][[분류:안양시(중국)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