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인조의 증손[br]{{{+1 임창군 | 臨昌君}}}'''}}}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임창군묘.jpg|width=100%]]}}} || ||<-2> {{{#ffd400 {{{-2 경안군 및 임창군 묘 전경}}}}}} || || '''봉호''' ||'''임창군(臨昌君)'''[* 봉호는 [[경상남도]] [[김해시|김해]]의 옛 지명인 임해(臨海)에서 유래했다.] || || '''휘''' ||혼(焜) || || '''출생''' ||[[1663년]] [[8월 3일]][* 음력 [[7월 1일]][[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7%5E%EC%86%8C%ED%98%84%EC%84%B8%EC%9E%90%ED%8C%8C%5E%EC%86%8C%ED%98%84%EC%84%B8%EC%9E%90%ED%8C%8C|#]]] || || '''사망''' ||[[1724년]] [[2월 29일]][* 음력 [[2월 5일]][[http://sillok.history.go.kr/id/kta_10402005_004|#]]][br](향년 62세) || || '''능묘''' ||경안군 및 임창군 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호 지정][br]{{{-3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123-44}}}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부모''' ||생부 -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 생모 -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허씨]] (盆城郡夫人 金海 許氏) || || '''배우자'''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박씨]](凝川郡夫人 朴氏)[* 박징(朴澂)의 딸] || || '''자녀''' ||{{{#!folding 슬하 6남 5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차남 - 밀남군 이감(密南君 李堪) 3남 - 밀원정 이용(密原正 李墉) 4남 - 밀천군 이담(密川君 李墰) 5남 - 밀평군 이집(密平君 李㙫) 6남 - [[밀운군]] 이훈(密雲君 李壎) 장녀 - [[평산 신씨|신사경]](申思敬)의 처 차녀 - [[황주 변씨|변치은]](邉致殷)의 처 3녀 - [[반남 박씨|박필륭]](朴弻隆)의 처 4녀 - [[상산 김씨|김동정]](金東鼎)의 처 5녀 - [[평산 신씨|신흡]](申㬛)의 처}}}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혼(李焜)[* [[광해군]]의 [[휘]]와 발음이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광해군의 경우 ‘琿’으로 쓴다.)]. [[소현세자|소현세자 이왕]]와 [[민회빈 강씨]]의 손자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경안군 이회]](초명은 이석견)의 장남이다. == 생애 == 1663년(현종 4년)에 태어났다. 임창군의 아버지 이석견(경안군)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사후 할아버지 [[인조]]에 의해 4살 때부터 [[제주도]]에서 형인 이석철(경선군), 이석린(경완군)과 함께 유배 생활을 했다. 이석철과 이석린은 귀양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서 죽었는데 그 내막이 석연찮다. 자세한 내용은 [[경선군]], [[경안군]] 문서 참조. 다행히 이석견은 살아남았고 삼촌 [[효종(조선)|효종]]이 즉위한 후 [[강화도]]로 옮겨갔다가 1656년(효종 7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해배[* 解配. 유배에서 풀려나다.] 2년 뒤에는 복권받아 경안군(慶安君)으로 봉해졌고 [[품계]]가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올랐다. 그러나 아주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한 후유증 때문인지, 경안군은 1665년(현종 6년)에 22살의 나이로[*A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요절]]하고 말았다. 그 때 임창군은 불과 3살이었다.[*A] [[경안군]] 사후에도 임창군과 그의 형제들은 왕실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효종(조선)|효종]]의 아들인 [[현종(조선)|현종]]은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졌었는지 상당히 잘해주었다. 그런데 ''''원래 왕이 되었어야했다''''는 위치 때문에 항간에서는 임창군을 왕위에 올릴 것이란 [[유언비어]]가 돌았고, 임창군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79년(숙종 5년) 3월에 결국 사건 하나가 터졌다. [[강화도]]에서 흉서가 나돌았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sa_10503012_004|#]] 내용은 이러했다. >흉서를 국청에 내려 제장들에게 보내다 >---- >"아! 오늘이 이 어떤 때인가? 혼란이 더없이 심한 날이다. 어지럽던 조정을 혁폐하여 종묘 사직을 붙들어야 할 텐데 합당한 사람이 없는 것이 한이구나. 아! 오늘의 위정자(爲政者)는 위로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백성을 저버려 외구(外寇)를 계도(啓導)하고 백성을 괴롭혀 성을 쌓으니, 이 무슨 심술(心術)인가? 이번 13일은 곧 [[인조반정|계해년(癸亥年) 반정(反正)]]한 날이다. 이날을 기하여 쳐들어갈 것을 의논하였는데, [[한성부|서울]]로 들어가는 길에 나루터 둘이 있으니, 하루 전날 [[비변사]]에 정문(呈文)을 올리고 각각 수백 인을 보내되 미리 배와 노를 준비하여 건넌다. 대중들을 한 곳에 모으고 다 모인 뒤에 영(令)을 내리기를 ‘사기(邪氣)가 대궐을 범했으므로 중들로 하여금 불경을 외어 쫓아내야겠기에 급급하게 불러들였다. '''[[소현세자|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손자 임천군(林川君)[* 임창군을 잘못 표기한 것인지 아니면 임천군에서 훗날 임창군으로 봉호가 바뀐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은 곧 [[경안군|경안군(慶安君)]]의 아들인데 지금 [[안국동|안국동(安國洞)]]에 살고 있다. 이분이 진짜 성인이며 또 나라의 종통(宗統)이다. 오늘 [[당쟁]]의 화가 이에 이른 것도 다 종통이 순서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 치고 그 누가 이 군(君)을 세워 국통(國統)을 바로잡고 붕당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으리요마는, 시세(時勢)에 눌려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제공(諸公)이 만약 이 임금을 세워 종통을 바로잡고 [[붕당]]을 제거한다면,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한 그 공은 다만 한 때만의 공이 아닐 테니, 어찌 쾌한 일이 아닌가?''' ...(후략)...“ >---- >《[[숙종실록]]》 8권, 1679년(숙종 5년) 3월 19일 갑인 5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sa_10503019_005|#]] 즉, ''''임창군이 왕실의 종통이니 그를 보위에 올려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배경은 이러했다. 1678년(숙종 4년) 말부터 숙종은 [[강화도]]에 돈대 수십 개를 축조하게 했고, 공사 시작은 다음해인 1679년(숙종 5년)부터 했는데 당시 강화도 백성들은 공사 진행으로 인해 논밭 경작 등에 꽤 큰 피해를 입었던 듯 하다.[[http://www.ghtv.kr/%EA%B0%95%ED%99%94%EC%9D%98-54%EB%8F%88%EB%8C%80-%EB%B6%84%ED%8F%AC%EC%A7%80%EB%8F%84/|#]] 그래서 반란 세력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이 흉서를 축성장 이우(李㒖)가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고변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우습게도 고변한 이우는 상은커녕 축성장 직에서 파면당하고 고문사했다.] 원래 저런 사건이 터지면 본인은 몰랐다하더라도 추대 대상인 왕족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임창군은 숙종의 배려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대신 동생 [[임성군(1665)|임성군]]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http://sjw.history.go.kr/id/SJW-D05030160-01600|#]] 이듬해인 1680년(숙종 6년)에는 [[한성부|한성]]과 가까운 [[교동도|교동]]으로 옮겨갔고[[http://sillok.history.go.kr/id/ksa_10605002_002|#]] 그 다음해인 1682년(숙종 8년)에는 [[해남군|해남]]으로 갔다가 1685년(숙종 11년)에 동생 임성군과 함께 [[유배]]에서 풀려났고 직첩을 환수받았다. 1686년(숙종 12년)에는 품계가 한 단계 올라갔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sa_11205025_002|#]], 1689년 1월[* 음력 무진년(숙종 14년) 12월.]에는 [[장렬왕후]]의 재궁(관)을 묻을 때 당숙 [[동평군]][* [[인조]]의 서장남 [[숭선군]]의 장남. 임창군에게는 서당숙이다.], 동생 [[임성군(1665)|임성군]]과 함께 참석했다.[[http://sjw.history.go.kr/id/SJW-D14120130-02400|#]] 1696년(숙종 22년)에는 중병을 앓던 동평군을 대신해 [[청나라]]에 정사(正使)로 다녀왔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sa_12209002_003|#]] 이후로도 3번 더 다녀왔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565|#]] 1718년(숙종 44년) 4월에는 [[민회빈 강씨]]의 신주를 [[소현세자]]의 묘당에 합쳐 모실 때 참여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sa_14404027_002|#]], 그해 9월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조선)|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어기구의 딸(훗날 선의왕후)]]이 가례를 올릴 때 납채례, 남정례, 고기례, 세자빈 책례 등을 [[민진원]]과 함께 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4408125_001|#]][[http://sillok.history.go.kr/id/ksa_14409001_001|#]][[http://sillok.history.go.kr/id/ksa_14409004_001|#]][[http://sillok.history.go.kr/id/ksa_14409013_001|#]] [[경종(조선)|경종]]이 즉위한 후 경종이 [[영조|세제 이금(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다른 [[종친]]들과 함께 명을 거두어달라고 아뢰었으나 거절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ta_10110015_006|#]][[http://sillok.history.go.kr/id/ktb_10110015_002|#]] 이런 일련의 기록들을 보면, 생애 초반에는 역모에 엮이는 등 고난을 겪었으나 유배에서 풀려난 후부터는 [[숙종(조선)|숙종]]의 배려로 왕실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살았던 것 같다. 실제로 《[[경종실록]]》의 〈임창군 졸기〉에 따르면, '만년에는 돌보아 대우함이 더 한층 융숭하여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ta_10402005_004|#]] == 사망 == 1724년(경종 4년) 2월 29일[* 음력 2월 5일.]에 사망했다. 향년 62세.[*A] 묘는 처음에 다른 곳에 있었다가 1745년(영조 21년)에 아버지 [[경안군]]의 묘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으로 이장되었다. 경안군과 임창군 묘는 1986년 6월 16일에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호로 지정받았다. 얄궂게도 조선 건국 과정에서 처형당한 [[최영]] 장군의 묘도 근처에 있다. == 대중매체에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해치 임창군.png|width=100%]]}}} || || {{{#gold '''〈해치〉의 임창군'''}}} || 2019년 [[SBS]] 드라마 〈[[해치(드라마)|해치]]〉 31회에서 등장했다. 배우는 미상. [[영조|왕세제 이금]]([[정일우]] 분)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우려다 역공을 당해 궁궐에 숨어있던 [[밀풍군]]([[정문성]] 분)의 과거 회상에서 나왔는데, 가난하게 살았으며 할아버지(소현세자)[* 작중에서는 증조할아버지라고 말했는데, 할아버지가 맞다.]와 아버지(경안군)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이 마음에 가득 쌓여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밀풍군을 왕재로 만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학대에 가까운 세뇌를 시켰고, 어린 밀풍군이 《[[소학]]》을 떼지 못하자 몹시 분노하여 "이러고도 누가 널 왕재로 보겠느냔 말이야!"면서 고함을 지르며 책을 찢어 불에 태웠다. 이후 45회에서 [[이인좌의 난]]이 실패한 후 피신해있던 밀풍군이 과거를 회상할 때 목소리로만 다시 등장했다. == 가족관계 == * 부 :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 1644 ~ 1665) * 모 :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盆城郡夫人 金海許氏, 1645 ~ 1723) - 사헌부장령 허확(司憲府掌令 許確)의 딸 * 동생 : [[임성군(1665)|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熀, 1665 ~ ?) - [[경선군]](慶善君)에게 출계 * 정부인 :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凝川郡夫人 宻陽 朴氏, ? ~ 1721) - 박징(朴澂)의 딸 * 장남 :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1698 ~ 1729) * 차남 : 밀남군 이감(密南君 李堪) - [[임성군(1665)|임성군]](臨城君)에게 출계 * 3남 : 밀원군 이용(密原君 李墉) * 며느리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홍수주(洪受疇)의 딸 * 손자 : 이항석(李恒錫) - [[밀풍군]](密豊君)의 3남 * 4남 : 밀천군 이담(密川君 李墰) * 며느리 : [[반남 박씨]](潘南 朴氏) - 박필진(朴弻鎮)의 딸 * 손자 : 이명석(李命錫) * 손자 : 이경석(李敬錫) * 손자 : 이성석(李聖錫) * 손녀 : [[풍천 임씨|임창주]](任昌周)의 처 * 손녀 : [[청송 심씨|심명진]](沈明震)의 처 * 손녀 : [[해주 정씨|정익조]](鄭益祚)의 처 * 손녀 : [[풍덕 장씨|장석구]](張錫龜)의 처 * 손녀 : [[임천 조씨|조학섭]](趙學燮)의 처 * 5남 : 밀평군 이집(密平君 李㙫) * 며느리 : [[한(성씨)|낭성 한씨]](琅城 韓氏) - 한세량(韓世良)의 딸 * 손자 : 이위석(李偉錫) * 손자 : 이준석(李儁錫) * 손자 : 이유석(李儒錫) * 손자 : 이휴석(李休錫) * 6남 : [[밀운군]] 이훈(密雲君 李壎) * 장녀 : [[평산 신씨|신사경]](申思敬)의 처 * 차녀 : [[황주 변씨|변치은]](邉致殷)의 처 * 3녀 : [[반남 박씨|박필륭]](朴弻隆)의 처 * 4녀 : [[상산 김씨|김동정]](金東鼎)의 처 * 5녀 : [[평산 신씨|신흡]](申㬛)의 처 === 후손들 === 그의 자식들도 소현세자 자손들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아들 밀풍군과 밀운군은 [[영조]] 시기 역모에 엮여 사사당했고, 심지어 5대손 이명혁(李明赫)과 이명섭(李明燮)도 [[철종(조선)|철종]] 시기에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유배갔다. 그럼에도 후손들의 대는 겨우겨우 이어졌고 결국 [[고종(대한제국)|고종]] 대에 이르러 완전히 복권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밀풍군]], [[밀운군]] 문서 참조.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안군, version=82, title2=밀풍군, version2=110)]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1663년 출생]][[분류:1724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소현세자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