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임우철}}}[br]林優喆'''}}}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임우철.jpg|width=100%]]}}} || || '''본관''' ||[[임(성씨)|부안 임씨]](扶安 林氏) || ||<|2> '''출생''' ||[[1920년]] [[9월 24일]]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진의리[br](現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 || ||<|2> '''사망''' ||[[2021년]] [[6월 8일]] '''(향년 100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41호 || || '''가족''' ||배우자 이계남, 슬하 1남 5녀 || || '''학력''' ||연기공립보통학교 {{{-2 (졸업)}}}[br]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 {{{-2 ([[토목공학과|토목과]] / 졸업)}}}||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임우철 애국지사.jpg|width=100%]]}}}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 생애 == 1920년 9월 24일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진의리(現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에서 태어났다. 연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6년 4월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 토목과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일본인 교장이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라고 추천했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1939년 3월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경성토목출장소에 고원으로 채용되어 공사계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1941년 2월 경성토목출장소를 의원면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코교쿠샤(攻玉社) 고등공업학교 토목과 야간부에 입학하며 재학한 후 5월부터 주간에는 도쿄시 토목국 건설과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김명기, 금림좌목, 금성응춘 같은 동급생들과 같이 1942년 12월까지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궁성요배]]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귀국한 이후에는 회사를 설립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였다. 공업학교 교원이 된 후 청소년 육성, 한국어 보급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함양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결국 1943년 12월 4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250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53&evntId=0034990733&evntdowngbn=Y&indpnId=000002182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 사망 == 2021년 6월 8일 오후 12시 14분, 서울특별시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100세. 빈소는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날은 10일 오전 7시, 유해는 2021년 6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분류:부안 임씨]][[분류:1920년 출생]][[분류:202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