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일성 이사금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신라 태자)] ---- [include(틀:신라 왕실)]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7대 국왕[br]{{{+1 逸聖 尼師今 | 일성 이사금}}}'''}}}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성왕릉.jpg|width=100%]]}}} || ||<-2> {{{#fbe673 {{{-2 일성왕릉 전경.}}} }}} || ||<|2> '''출생[br]{{{-3 (음력)}}}''' ||[[44년]](?) || ||[[사로국]] [[서라벌]] || ||<|2> '''사망[br]{{{-3 (음력)}}}''' ||[[154년]] [[2월]] (향년 110세?) || ||[[사로국]] [[서라벌]] || || '''능묘''' ||[[일성왕릉]] || ||<|4>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신라의 태자}}}''' || ||연대 미상 ~ [[57년]] [[10월]] || ||'''{{{#fbe673 제7대 이사금}}}''' || ||[[134년]] [[8월]] ~ [[154년]] [[2월]] {{{-2 (21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밀양 박씨]] || || '''휘''' ||일성(逸聖) || || '''부모''' ||부왕 [[유리 이사금]][br]모후 이리생부인 || || '''형제자매''' ||이복 동생 [[파사 이사금]] || || '''왕후''' ||왕후 박씨[* 지소례왕의 딸이라고 전한다.] || || '''자녀''' ||왕자 박토원, [[아달라 이사금|박아달라]] || || '''왕호''' ||'''일성 이사금(逸聖 尼師今)''' ||}}}}}}}}}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7대 군주. 칭호는 [[이사금]]. 어머니는 일지 [[갈문왕]]의 딸 이리생부인이며,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이다. == 아버지는 누구? == 《[[삼국사기]]》에서는 [[유리 이사금]](제3대)의 장남 또는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유리 이사금]]의 장인이라고 하므로 이에 따르면 박일성은 박일지의 외손자가 된다.]이라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유리 이사금의 형 또는 [[지마 이사금]](제6대)의 아들이라고 했다. 한편 148년(일성 이사금 15년)에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한 사실을 근거로 박아도가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박아도가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며,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데 군주가 되지 못한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성 이사금이 박아도의 아들이라면 즉위한지 15년이나 지나서야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삼은 것이 문제가 된다. 게다가 박아도가 [[파사 이사금]]의 손자라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도 문제다. 사실 파사 이사금(제5대)부터가 유리 이사금의 차남 또는 조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해진다. 가족 관계에 대해 혼란스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의심하게 하는 단서 중 하나가 되고 있으며 해석에 대해서도 각종 학설이 쏟아지고 있다. 사실 《삼국유사》까지 가져와 가족 관계를 따져보면 언뜻 보기에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여럿 있는데 기록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에 대두되는 학설이다. 《족보》를 따지느냐, 씨족을 따지느냐에 의한 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설에도 허점이 있고, 실질적으로 당시 신라인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기 힘들다.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훨씬 앞 시대인 이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일성 이사금과 파사 이사금 둘 다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라는 것이 맞다고 가정하고서 《삼국사기》 기록을 보더라도 조금 이상하다. 일성 이사금이 [[형]], 파사 이사금이 [[동생]]인데 동생이 먼저 즉위했으며, 즉위한 것은 서기 80년이었다. 이후 [[조카]]인 [[지마 이사금]]을 한 번 거쳐 일성 이사금이 군주가 된다. {{{#0040ff 동생이 왕위에 오른지 54년만에 형, 아버지가 [[사망]]한 지 77년만에 장남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후 왕위에 올라 20년을 다스린다. 이쯤 되면 일성 이사금의 나이를 역으로 계산해 볼 수 있는데 파사 이사금의 기록에 따르면 {{{#0040ff 형보다 현명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더 똑똑한지 아닌지 알려면 그래도 최소한 8세 이상은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형은 서기 80년에 최소 9세 이상. 그렇다면 왕위에 오를 때는 최소 63세가 된다. 이후 20년 동안 더 살았으니 《삼국사기》 기록을 믿는다면 최소 80세 이상은 살았다는 말이 되며, 너무 최소에 맞춰 타이트하게 [[계산]]하지 않고 좀 더 현실성 있게 되려면 90세 이상 [[장수]]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 확실하다면 {{{#0040ff 아버지 유리 이사금이 죽은 해에 일성 이사금이 태어났다고 해도}}} 최소 97세 이상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것도 타이트하게 계산한 것이니 실제로는 100세를 넘겼다는 말이 된다. 이런 비현실적인 [[수명]]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고구려]]의 [[태조대왕]], [[명림답부]], [[차대왕]], [[신대왕]] 등 다양한 곳에서 나타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수왕]]의 경우, 97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러 사서와 교차 검증도 되고 현실에서도 장수한 축에 속하는 나이라 사실일 가능성이 100%이다.] 다만 위에 나온 기록 중 형보다 현명하다는 기록은 표면상의 이유고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 생애 == 군주가 됐을 때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즉위 이전의 행적은 기록이 남은 것이 별로 없다. 134년 [[즉위]] 직후 다른 군주들처럼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사면한 뒤에 138년 [[경주시|금성]](金城)에 [[국가]] 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했다. 144년에는 모든 주군(州郡)에 제방(堤防)을 수축하고, 전야(田野)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했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당시 금•은과 주옥의 사용이 [[진한]]의 [[풍습]]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당시 귀속된 [[동호]]계 [[오환족]]의 고유 풍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기록에는 오환족의 풍습 중 금•은•주옥을 사용하는 것이 있다고 되어 있다. 146년에는 [[파사 이사금]] 때 항복했던 [[압독국]](押督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고, 주민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남쪽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148년에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에 삼았다. [[지마 이사금]]과 마찬가지로 재위 중에 여러 번 북방 [[말갈]]족의 침입을 받아서 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도 했는데, 약 세 차례(137년 1번, 139년 2번)의 침입이 있었다. 138년 10월 군주가 친히 북쪽 [[영토]]를 순행하고 [[태백산]]에 들러 [[하늘]]에 제를 올리기도 했으며, 140년 2월 말갈을 막기 위해 장령 고개에 [[목책]]을 세우기도 했다. 말갈이 자꾸 쳐들어오자 142년 7월에는 아예 [[예방전쟁]]격으로 선제 공격해서 뿌리를 뽑자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기에 수시로 [[여진족]]을 공격해 [[한반도]]로 못 쳐들어오게 약화시켜 놓았던 것과 비슷하다.] 대신들을 불러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찬]] [[웅선]]이 반대해서 그냥 그만뒀다. 다만 이 말갈은 훗날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부족이 아니라, 실제로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에 분포하던 [[동예]] 계통 집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말갈]] 문서 참조. 지마 이사금과 마찬가지로 재위 기간 내내 [[천재지변]]이 잦았다. 145년, 남쪽 지방의 [[가뭄]]이 특히 심각했는지 타 지역에서 [[식량]]을 급히 옮겨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재위 21년인 154년, 승하했다. 그의 아들이 일성 이사금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신라 초기의 마지막 [[박(성씨)|박씨]] 군주인 [[아달라 이사금]]이다. == [[일성왕릉]]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일성왕릉)]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23번지 소재. [[대한민국의 사적]] 제173호.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68&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일성 이사금 본기]]>''' 一年秋八月 일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사면을 하다 二年春一月 시조 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一月 웅선을 이찬으로 근종을 일길찬으로 임명하다 四年春二月 말갈이 장령을 공격하다 五年春二月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다 五年秋七月 알천 서쪽에서 사열하다 五年冬十月 북쪽으로 순행해 태백산에 제사지내다 六年秋七月 서리가 콩을 해치다 六年秋八月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다 六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했다가 퇴각하다 七年春二月 장령에 목책을 세우다 八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九年秋七月 [[말갈]]을 정벌하려다 중지하다 十年春二月 궁실을 수리하다 十年夏六月 화성이 토성을 침범하다 十年冬十一月 [[천둥]]이 치다 十一年春二月 제방 수리와 전야 개척을 명하고 민간의 금은주옥 사용을 금하다 十二年 기근이 들자 진휼을 베풀다 十三年冬十月 압독의 반란을 토벌하다 十四年秋七月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추천하도록 하다 十五年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삼다 十六年春一月 득훈을 사찬으로 삼고 선충을 나마로 삼다 十六年秋八月 살별이 천시에 나타나다 十六年冬十一月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돌다 十七年夏四月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十八年春二月 대선을 이찬으로 삼다 十八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年冬十月 궁궐 문이 불타고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一年春二月 왕이 죽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일성 이사금까지가 《삼국사기》 1권이다. == 같이보기 == * [[실제로 장수한 군주들]] * [[천일창]] [각주] [[분류:이사금]][[분류:154년 사망]][[분류:밀양 박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일성 이사금, d=2023-01-17 22: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