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현재 일본의 방위를 담당하는 해상 병력, rd1=해상자위대)] [include(틀:역대 일본의 군사조직)] [include(틀:일본군)] ||<-2>
{{{#ffffff {{{+3 '''대일본제국 해군'''}}}[br]'''[ruby(大日本帝國海軍, ruby=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かいぐん)][br]Imperial Japanese Navy (IJ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욱일기|[[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width=100%]]]]}}} || ||<-2> [[욱일기|{{{#ffffff '''해군기'''}}}]][* 같은 욱일기이지만 중심의 태양 모양이 왼쪽에 살짝 치우친 점에서 육군기와 다르다. 그리고 이 깃발의 디자인은 [[해상자위대]]에 계승되어 현재도 사용된다. 다만 위키미디어 공용에서는 해군의 욱일기가 색이 어두운데, 일본 제국 국기 - 일본국 국기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색조가 지정된 것은 아니다.] || || {{{#ffffff '''존속기간''' }}} ||[[1869년]] ~ [[1945년]] || || {{{#ffffff '''명령 체계''' }}} ||[[대본영]] || || {{{#ffffff '''군종''' }}} ||[[해군]] || || {{{#ffffff '''해군가''' }}} ||[[군함행진곡(일본)|군함행진곡]](軍艦行進曲) || || {{{#ffffff '''국가''' }}} ||[[일본 제국|[[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30]]]] [[일본 제국]] || || {{{#ffffff '''본부''' }}} ||[[해군성]] : [[도쿄도]] 고지마치구 || || {{{#ffffff '''기념일''' }}}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 || || {{{#ffffff '''주요참전''' }}} ||[[운요호 사건]][br]'''[[청일전쟁]]'''[br][[의화단 운동]][br]'''[[러일전쟁]]'''[br][[제1차 세계 대전]][br]'''[[제2차 세계 대전]]'''[br]'''·''' '''[[태평양 전쟁]]'''[br]'''·''' [[중일전쟁]] || ||<-2> {{{#ffffff '''지휘'''}}} || || {{{#ffffff '''대원수''' }}} ||[[메이지 덴노]][br][[다이쇼 덴노]][br][[쇼와 덴노]] || || {{{#ffffff '''해군대신''' }}} ||[[사이고 주도]](초대)[br][[요나이 미쓰마사]](말대) || || {{{#ffffff '''군령부총장''' }}} ||이토 토시요시(초대)[br]도요다 소에무(말대)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제국]] 시절의 [[해군]]. 정식명칭은 대일본제국해군(大日本帝國海軍)이다. 전후 [[해상자위대]]가 욱일기와 주요 간부진을 그대로 계승[* [[육상자위대]]도 욱일기를 쓰지만 뻗어나가는 빛줄기가 8개짜리인 8조(条) 욱일기고, 해상자위대는 일본군 시절의 16조를 그대로 이어서 쓴다.]했다. == 상세 == 최고통수권자는 육군과 마찬가지로 [[천황]]이었으며 내각에는 권한이 없었다. 그 아래로는 [[군정권]]은 해군대신, [[군령권]]은 군령부총장[* 해군 참모총장에 해당한다. 일본 육군이 주도하던 참모본부에서 해군이 떨어져나온 이후 "군령부"라는 독자적인 명칭을 사용했다.], 실전부대 지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담당하는 일종의 [[과두제]] 구조였다. 1930년대 당시 셋의 위상은 복잡했다. 해군대신이 명목상 서열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군령부총장 재임시기 [[군정권]]에 해당하는 '''병력량 결정권'''을 군령부로 가져온 이래 해군성은 예산 셔틀로 전락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같은 스타급 인사가 연합함대를 틀어쥐고 있을 경우는 역시 상급자인 해군대신, 군령부총장도 통제를 못 했다. 다만 역시 세 군데 중 가장 권력이 강한 곳은 군령권을 가진 군령부였다. 군령부 제 1과 작전과의 10명 남짓되는 참모들이 200만 제국 해군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이런 기형적 체제는 대전 말기 연합함대 전력이 거덜나면서 군령부의 발언력이 약화되고, 내각총리대신과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경험해본 마지막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제독]]이 군령부총장 [[도요다 소에무]] 제독을 '''[[짬]]으로''' 누를 수 있게 되고서야 수습되었다. 전시에는 육군과 [[대본영]]을 설치했다. 프로이센 육군을 모방한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을 모방했다.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제해권]]을 중시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잘 알려져있듯 육군과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미국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합동작전을 실시했지만 일본 육해군이 합동전투를 한 것은 [[과달카날]],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레이테 만 해전]]뿐이었다. 인원은 해군이 훨씬 적어서 육군보다 복지가 좋았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육군에서 많이 느꼈다. 거기다 해군은 말단 [[수병]]들도 근무 여건이 [[병사]]에 비해 좋고 기술도 배울 수 있어 입대경쟁이 치열했다. 육군에서는 일부 [[공병]], [[운전병]], [[통신병]], [[항공병]] 같은 기술 특기가 아닌 이상에야 입대부터 전역까지 [[소총]] 한 자루만 닦으며 구르기가 일상이었다. 그에 반해 대부분 해군은 어마어마한 기관부 혹은 그에 준하는 기계장치들을 다루는 것이 일이며, 해군에서 막일꾼으로 취급받는 [[갑판병]]조차 [[페인트]] 도색 등 [[선박]] 유지/보수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이는 전역시 민간에서도 꽤 쓸모 있는 것들이었다. 남들이 육군에서 구를 때 해군으로 들어온다면 공짜로 기술을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사회 그리고 현재 21세기의 중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징집병일 때 배워온 운전, 정비, 항해 등의 기술로 평생을 먹고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메리트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전부 이러한 인식이 있는 만큼 경쟁률은 어마어마해 대거 주로 엘리트~준엘리트들이 뽑혀가는 경향이 강했고, 육군 병사들이 심상소학교도 겨우 마친 이들이 득시글거릴 때 해군 수병들은 못해도 고등소학교는 나와야 들어갈 수 있었고, 당시 기준으론 꽤 고학력인 중졸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이는 해군의 선민의식과 귀족화에 한몫을 했다. 대신 국내 정치에서 입김이 강한 것은 육군이었으니 해군도 아쉬운게 있기는 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군계 수장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1898년 '''원수육군대장'''으로 계급승진)가 바로 육군출신, 여기다가 초창기 조슈번 출신들이 육군을, 사쓰마번 출신들이 해군을 구성하는 데 중심축이 되었는데, 세이난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사쓰마번 계열들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더하여서 야마가타 이외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모두 조슈번 출신이였다.] 전통적으로 일본 육군은 [[러시아 제국]] 및 후계자인 [[소비에트 연방]]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지만, 해군은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다. 출신 학교와 학교에서의 성적을 따지는 철저한 학력 절대주의 집단이었으며, 해군의 특성상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서양인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 해군 장교들에게는 [[영어]] 등 외국어 교육을 포함해 상당한 수준으로 [[교양]]을 가르쳤던 것이 특징이다. 그 덕분에 해군의 장교들은 사회 상류층 이상으로 교양을 쌓은 이들이 일반적이었고, 일본 제국 신민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는 해군 내부의 파벌다툼으로 인해 인사 정책이 우왕좌왕할 가능성을 막을 객관적 인사 기준이 학교 성적뿐이었기 때문이고, 육군에 비해 수가 적었기에 1인당 교육비를 더 많이 지출할 수 있었던 덕도 있었다. 이런 해군 특유의 귀족주의 현상은 일본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1인당 소득은 다소 처지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해군에 투자를 좀 한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쪽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비록 병과사관에 비해 무시되는 면이 없지 않았으나, 비병과사관들인 [[주계|주계과]][* 재정, 회계를 당시 일본에선 주계라고 불렀다.], 군의과, 기술과, 법무과 등으로 임관하는 2년제 단기사관 대우가 육군 동 병과 대비 매우 좋았다. 병과가 아니면 장교 취급도 못 받았다 같은 건 사병들의 뒷담화 내지는 지휘 계통에서의 배제 등이었지, 일단 자기 계급에 맞는 의전은 확실히 받았고 전투 쪽으로는 무시당했을지언정 그들의 특기인 전문 분야 쪽으로는 병과사관들도 비병과사관들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아예 병과사관들과는 반쯤 별세계 사람처럼 여기며 지내는 편이라, 한두 계급 정도면 병과와 비병과사관들끼리 상호 존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현 대한민국 국군도 직속상관이거나 장성이 아닌 이상 군법무관이나 군의관, 군종목사 등 특수병과 장교들에겐 일반적으로 상호존대를 하지만, 일본 해군에선 아예 기술행정직 장교들과도 그렇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대 출신 고학력자나 정치 및 경제계의 유명 인사의 자제 등이 해군으로 몰리는 효과도 있었고, 이들이 전후 일본의 정계 및 제계에 대거 진출하며 해군을 좋게 평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선민사상|삐딱한 엘리트 의식]]을 낳아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체계가 갖춰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군내부에서의 지위와 대우는 오로지 학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실제 능력은 그 다음 문제였다. 또한 장교들이 엘리트 의식에 빠진 탓에 사병들은 장교가 될 수 없었다. 경력이 오래되고 능력 있는 사병들을 그대로 수병, 하사관에서 썩게 만드는 것은 전력손실이라는 이유로 제도가 개편되긴 했는데, 그렇게 생긴 것이 특무사관이라는 특별 계급이다. 하사관에서 능력 있는 인물들을 특무사관으로 진급시켜 특무소위~대위로 임관하여 장교 취급을 해주긴 했는데,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었다. 계급장부터가 한 눈에 봐도 일반 위관급 사관과는 구분되도록 디자인 했고, 아직 부임조차 하지 않은 [[일본해군병학교]]를 갓 졸업한 견습사관의 지휘권이 특무대위보다 위에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교들로부터도 같은 급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차라리 [[준위|병조장]]으로 남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하사관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수병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했고, 장교 계급 외의 군기는 상당히 막장이었다.[* 반면 육군에서는 학력과 성적은 일절 관계 없이 모두가 똑같이 개 같은 취급을 받았다. 장교들은 출신학교에 따라 인맥을 타느라 계급에 영향이 있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능력이 중시되었고, 하사관들도 장교 진급이 가능했다. 또 이렇게 진급한 하사관들은 장교들과 계급상 규정된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비육사라고 암암리에 무시되는 건 장교들 사이에서 마찬가지긴 했다. 게다가, 비전투병과 장교의 질과 대우는 해군이 앞서 언급한 이유로 훨씬 좋았다.] 결국 1942년에 기존 특무사관들을 전부 일반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 사병 출신들이 사관이 될 수 있는 길을 아예 막았다. 소좌로의 진급도 특무사관 출신들은 거의 막혀 있어서 해체시까지 특무 출신 소좌는 불과 수십 명, 중좌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고 대좌와 [[제독]]은 한 명도 없었다. 특무 출신 신규 좌관급 사관이 한 명이라도 나오면 전 해군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다만, 특무사관이 소좌가 되면 일반사관으로 편입돼 특무소좌가 아닌 소좌 계급이 되어 특무 시절과 달리 엄연히 대위보다 선임자였고, 소좌들과 마찬가지로 덴노로부터 [[군도]]도 하사받았다. 또한 이렇게 바늘구멍 수준의 진입 장벽 탓에 의외로 특무 출신 좌관급들은 [[근성|"특무 출신인데도 소좌를 달 정도면 인정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진급에 대해 불이익은 있을지언정 주변으로부터 다른 의미로 존경과 대우는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보급의 중요성 자체는 이들도 알고는 있었고 잘 갖춰진 기지에서의 보급은 일본의 경제사정에 비해서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 사실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병참 능력은 진보하는 축이었다. 당장 해외시장에서 사오거나 영미의 지원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야 했던 러일전쟁 즈음과 달리 어지간한 장비는 훨씬 대규모로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보급의 범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넓어졌다.][* 사실 말 그대로 원론적 관점에서 보급을 무시하는 나라는 거의 찾기 어렵다. 오늘날 북한조차도 일반인들에 비해 군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의복이나 식량 등의 지원을 해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니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군인들은 소속국의 일반적인 국민들에 비해 대부분 실제로 잘 먹었고 또 잘 먹어야 했다. 문제는 그러한 보급을 적시적소에 수행하는 노하우다.] 하지만 그것도 영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었고, 당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때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은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서 나치독일의 동맹으로서 기여는 영미보다 미미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과는 달리 상당히 활약했는데 태평양 전쟁 초반까지는 미 해군과 그럭저럭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다. 실제로 개전시 일본 해군의 전력은 영국과 미국에 이은 3위였다.[* 런던 해군 군축조약 등을 거치고도 태평양 개전 1년 전인 1940년 6월 기준으로 항공모함 8척, 전함 10척, 순양함 47척, 구축함 134척,잠수함 66척을 보유했다.] 전쟁 초반에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전함 상당수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면서 잠시 동안 미국보다 전력이 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전략적 능력의 부재, 국력의 차이 등 이유로 미국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따지고 보면 해군 하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상대적 후진성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 == 역사 == === 기원 ===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도쿠가와 막부]] 휘하의 수군일 것이다. [[막부]] 수군은 1853년에 이양선이 나타나자 해군으로 정비하였다. 재래식 군선으로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쿠로후네]](黑船)를 당할 바는 아니었다. [[쿠로후네 사건]]으로 1854년 강제개항을 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근대적 해군이 필요함을 절감, 1866년 대규모 군제 개혁을 실시해 해군 봉행을 설치하고 해군 총재를 뒀다. 당시 일본엔 막부 말고도 각 번에서도 해군력을 조직했는데, 막부 해군은 영국에서 고문단을 초빙해 본격적인 해군을 양성하려고 하였고 동아시아에서 규모도 가장 컸다. 그러나 막부 해군은 제대로 세워지기 전에 대정봉환으로 신정부에 흡수되었다. 1870년엔 육군과 해군이 분리되고 도쿄 츠키지[* 어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노량진]] 같은 곳.]에 해군성을 설치했다. 초기에는 [[사쓰마]][* 현재의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 남동부를 지배한 곳으로 당시 현 야마구치현 인근을 중심으로 한 [[조슈 번]]([[나가토]]국)와 함께 일본 정치, 군사 쪽에서 강세를 보인 세력으로도 유명함. 이곳을 다스리던 가문이 그 유명한 [[시마즈]] 가문이다.]가 주도했으며 1876년에 [[일본해군병학교]]가 세워진다. [[서남전쟁]]으로 사쓰마가 밀려나면서 일본군 내부에서 육군 중심주의가 강해진다.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도 했다.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 [[청일전쟁]]은 풍도 해전으로 시작되었으며 [[황해 해전]]과 웨이하이웨이 전투에서도 [[이홍장]]의 [[북양함대]]에게 크게 이겼다. 자세한 내용은 [[청일전쟁/해군 전투력 비교]] 참조. 대규모 승전은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를 궤멸시킨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이 대표적이다.[* 여기서가 해군의 위상이 아주 높아질 수 있는데, 러일전쟁에서 육군은 '''이미 장악된 한반도를 경부선과 경의선을 타고 지났으며, 압록강을 건너 봉천까지는 청일전쟁 당시 이미 지나갔던 지역'''까지 가는 데에 상당수의 전력을 소모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의 극동육군은 북만주일대가 중심지였기에 반드시 이곳까지 가야 했음에도, 당시에 이곳까지는 철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에 보급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해군이 당시 세계적으로 알아주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기면서 극동육군의 지연전을 후퇴로 만들어버릴 수 있게 되었고, 일본으로의 상륙을 방지하면서 러시아로 하여금 휴전협정에 나서도록 압박할 수 있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의 요청으로 독일령 칭다오([[키아우초우]])에 대한 공략에 나섰다. 이를 [[칭다오 전투]]라 한다. 그리고 칭다오를 탈출하여 통상파괴전을 벌이는 독일 아시아 함대 추격전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미국과 협력하여 태평양에서 활동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지중해]]로 파견되어 수송선 호위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잠수함대와 [[독일 제국 해군]] 지중해 전단의 통상파괴전으로 지중해 지역의 해상 교통로가 큰 타격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오스만 제국군]] 해군 또한 동지중해에서 미약하게나마 활동했다. 그리하여 [[카바급 구축함]] 8척을 중심으로 특수 편성된 제2특수전단이 지중해에 파견되었으며, 전쟁 끝날 때까지 지중해의 해상로를 보호했다. 다만 이들이 격침시킨 적 함선은 없었다. 해당 전단은 계속 증원되어 총 순양함 3척, 구축함 12척, 그리고 영국 해군 소속 구축함 2척과 건보트 2척이 제2특수전단을 거쳐갔다. 이 중 카바급 구축함 사카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U보트]] U-27함의 기습적인 뇌격으로 인해 대파되기도 했으나 간신히 살아남아 수리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 7척을 전리품으로 인계받기 위해 스코틀랜드 북부에 위치한 영국 [[대함대]]의 모항인 스캐퍼 플로로 이동했다가, 런던 및 파리에서 열리는 승전 기념식에 참석하고는 귀국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 1941년에는 [[진주만 공습|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진주만 공습의 대성공으로 상당수의 [[미합중국 태평양함대|미 태평양함대]] 전함들을 전열 이탈시킨 일본 제국 해군은 필리핀을 비롯한 서남태평양 등지를 휩쓸며 전쟁 초반 연합국에 우세를 점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은 미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배하며 제해권을 상실했고, 끝내 1945년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해군성은 제2복원성으로 불린다. 육군과 달리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저항하느라 연안에 기뢰를 잔뜩 설치해뒀고 이를 제거할 소해부대가 필요했으며 또한 해외 거주 일본인과 일본군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수송선단을 운용할 승무원도 다수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1만 명 가량의 해군 인력이 그대로 잔류할 수 있었다. 이후 [[해상보안청]]으로 개편되었다가 1952년에는 보안대란 이름으로 [[해상자위대]]의 전신이 해상보안청에서 분리되었다. 사실상 해상자위대는 일본 해군을 계승했다. 그것도 과거의 악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물론, 구 일본 해군 시절에 비하면 많이 없어지긴 했다.[* 사실 자위대 자체가 일본군의 구타, 가혹행위가 상당부분 남아있다.] 해군병의 복무기간은 3년, 해군 지원병은 5년이었다. == 상징 == 상징 이미지는 [[벚꽃]], 상징 [[깃발]]은 해군용 [[욱일기]]를 썼다. [[파일:external/wiki.gcdn.co/IJN_Ryujo.jpg|width=500]] 항공모함 [[류조(항공모함)|류조]]. 일본 해군 함선 중 [[주력함]]에 해당하는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과 [[포함]]의 함수에는 [[일본 제국]]의 국장이자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 문장]](菊花紋章)이 달렸는데, 나무에 진짜 [[금]]으로 금박을 두껍게 씌워서 [[금색]]으로 만들었다. 크기가 상당히 컸기에 금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그래서 국화 문양을 함수에 붙이는 작업을 한 인원들은 작업 후 금박을 빼돌렸을지도 모른단 이유로 탈의 상태에서 군의관에게 [[항문]]까지 검사받았다고 한다. 근데 [[포함]]은 구축함 수준으로 작은데도 특별히 국화 문양을 달았다. 이유는 포함은 바다의 [[대사관]] 역할을 했기에 국내외 고위급 인사가 승선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포함은 톤수만 작을 뿐이지 [[대령|대좌]]가 [[함장]]으로 부임하는, 의전서열이 매우 높은 함들이었다. [[하츠하루급]] 구축함 네노히(子日)의 함장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시무슈형]] [[해방함]] 쿠나시리(国後)에게 '왜 귀함은 본함에 [[대함경례|경례]]를 하지 않는가.' 하고 따졌다가 쿠나시리가 국화 문양을 달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죄하러 쿠나시리에 직접 다녀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국화 문양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막강했다. 국화문장은 일종의 계급장처럼 통용되었기 때문에 해군에서 급이 낮은 함선 취급을 받았던 [[구축함]], [[잠수함]] 등 소형함은 감히 국화문장을 달지 못했다. [[욱일기]]를 비롯해 구 일본 해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계승한 [[해상자위대]]는 의외로 국화 문양은 달지 않는다. 덴노는 국가원수이긴 해도 상징적인 존재일 뿐 아무 실권이 없음을 [[일본국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므로, 군함을 덴노가 '하사'한다는 건 현 일본의 통치 제도 하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화 문양은 과거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의 국장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는 점도 변함없는 데다, 국화문양이 달린 것은 '일본 황실의 소유' 또는 '일본 황실이 하사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현존하는 함선 중 국화 문양이 달린 함선은 [[요코스카]]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더는 군함이 아닌 [[미카사]]가 유일한데, 이것도 진품이 아닌 플라스틱 모조품이다. == 군복 == ||
[[파일:external/www.ibiblio.org/hb-11-6.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ibiblio.org/hb-11-5.jpg|width=98%]] || 해군 사관의 복장은 동계용인 제1종과 하계용인 제2종이 있었다. 제1종 군장은 보편적인 영국 해군식의 더블 버튼 자켓이 아니라 1920년대 미 해군 장교용 근무복 형태의 자켓을 사용했다. 이 복제가 시대에 뒤떨어진다 하여, 서구 해군과 동일한 더블 버튼 형태로 바꾸려는 개정안이 1920년대에 올라왔으나, 해군 원로로 추앙받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쓰시마 해전|내가 이 옷을 입고 러시아 해군을 이겼는데]] 어찌 없앤단 말이냐?" 하며 극렬 반대해 무산되고 종전시까지 계속 쓰였다는 일화가 있다. 무더운 남태평양에서 목을 조이는 모직 로먼 칼라 제복은 꽤 더웠을 것이다. 동예복은 더블 버튼 형태의 모닝 [[코트]]에 [[검정]] [[넥타이|보우 타이]]를 착용하는 국제 표준(?)형 [[디자인]]이었다. 제2종은 흔히 해군 장교하면 떠오르는 더블 버튼 자켓이었다. 모자는 정모와 약모를 착용했으며, 계절에 따라 이쪽도 제1종 약모, 제2종 약모 등으로 불렸다. 색상도 계절에 맞는 복장과 똑같다. 단화는 제1종에 신는 흑단화, 제2종에 신는 백단화가 있었다. 하사관의 복제는 사관과 유사하나, 동복인 제1종 군장의 경우 사관들이 단추 없이 후크로 여미는 형태인 것과 달리 하복인 제2종 군장처럼 금색 단추를 잠그는 [[가쿠란]] 형태였다. 하사관도 사관처럼 정모와 약모를 착용했다. 다만 하사관의 정모는 사관용과 달리 모표가 닻 하나만 딸랑 박혀있는 것이었고, 약모는 줄이 두 개인 사관용과 달리 하나였다. 수병의 복제는 타국 해군과 거의 차이가 없는 [[세일러복]]이었다. 칼라의 흰줄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3줄이 아닌 1줄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해상자위대]]에선 두 줄로 늘어났다. 모자의 경우는 페넌트가 달린 정모와 줄 없는 약모를 착용했다. 수병들 가운데 [[헌병]] 임무를 수행하는 인원과 조종사 교육생인 예과연습생 등은 예외적으로 각각 하사관 및 해군병학교 생도 피복과 유사한 복제를 착용했다. 여기에 하사관과 수병들은 함정에선 흰색 누더기 같은 작업복도 입었다. 미 해군의 샘당과 비슷한 것으로, 이쪽도 전투복 대용으로 쓰였다. 영화 [[미드웨이(2019)|미드웨이]]에 나오는 일본군 함정 승조원들이 입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업복이다. 육전대는 세일러복에 철모+혁대+각반 조합을 사용했다. 하지만 세일러복은 위장 능력이 나빴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고자 1933년부터는 해군용 육전복을 입었다. 육전대원들의 철모에는 해군임을 알리는 닻이 그려져 있었으며, 이전과는 달리 붕대형 각반을 착용했다. 해군특별육전대 소속의 공정부대 병력들은 육전복과 붕대형 각반 대신에 강하복 및 강하화를 착용했다. 1943년에는 육전복과 디자인이 비슷한 황록색 해/육상 전투복인 제3종 군장이 도입되었고, 기존 제1, 2종 군장은 정복으로만 쓰게 된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3257917&orderClick=LAH&Kc=|지팡구 16권 표지의 사관용 3종 군장]] 육전 소요가 늘어나 함정과 육상에서 함께 입을 수 있는 전용 피복 소요가 제기된 점, 사관용 1, 2종은 옷깃이 목을 감싸는 차이나 칼라 형태라 불편했던 점 등이 도입 사유다. 육전의와는 형태가 비슷해, 전시 물자 부족에 더해 종전시까지 서로 혼용됐다. 해군 사관용 육전의와 3종 군장은 일본군에서 [[넥타이]]를 착용하는 몇 안 되는 피복이다. 1945년부턴 원가 절감을 위해 보다 개악된 4종 군장도 나온다. == 관련 인물 == ||<-6>
[[파일:Imperial_Japan-Navy-OF-10-collar.svg.png|width=30]] {{{#ffffff '''대원수(육, 해)''' }}} || ||<-2> [[메이지 덴노]] ||<-2> [[다이쇼 덴노]] ||<-2> [[쇼와 덴노]] || ||<-6> [[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9-collar.svg.png|width=30]] {{{#ffffff '''원수해군대장''' }}} || ||<-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사이고 주도]][br]西郷従道 || 토츠카 분카이[br]戸塚文海 || 이토 스케유키[br]伊東祐亨 || 이노우에 요시카[br]井上良馨 || [[도고 헤이하치로]][br]東郷平八郎 ||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br]有栖川宮威仁 ◆ || 이주인 고로[br]伊集院五郎 || ||[[가토 도모사부로]][br]加藤友三郎 ◆ ||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br]伏見宮博恭王 || [[야마모토 이소로쿠]][br]山本五十六 ◆ || [[나가노 오사미]][br]永野修身 || 고가 미네이치[br]古賀峯一 ◆ ||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br]東伏見宮依仁 ◆ || 시마무라 하야오[br]島村速雄 ◆ ||<-5>◆ : 사후추서 ||}}} || ||<-6> [[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8-collar.svg.png|width=30]] {{{#ffffff '''해군대장''' }}} || ||<-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가바야마 스케노리[br]樺山資紀 || [[야마모토 곤노효에]][br]山本権兵衛 || 가와무라 스미요시[br]川村純義 || 사메시마 카스노리[br]鮫島員規 || 시바야마 야하치[br]柴山矢八 || 히다카 소노죠[br]日高壮之丞 || || 가타오카 시치로[br]片岡七郎 || 가미무라 히코노죠[br]上村彦之丞 || 데와 시게토[br]出羽重遠 || 우류 소토키치[br]瓜生外吉 || [[사이토 마코토]][br]斎藤実 || 미스 쇼타로[br]三須宗太郎 || || 후지이 코이치[br]藤井較一 || 요시마츠 시게타로[br]吉松茂太郎 || 야시로 로쿠로[br]八代六郎 || 카토 사타키치[br]加藤定吉 || 나와 마타하치로[br]名和又八郎 || 야마시타 겐타로[br]山下源太郎 || || 무라카와 카쿠이치[br]村上格一 || 아리마 료키츠[br]有馬良橘 || 야마야 타닌[br]山屋他人 || 타카라베 타케시[br]財部 彪 || 쿠로이 데이지로[br]黒井悌次郎 || 오치나이 소지로[br]栃内曽次郎 || || 노마구치 카네오[br]野間口兼雄 || 스즈키 간타로[br]鈴木貫太郎 || 오구리 코자부로[br]小栗孝三郎 || 타케시타 이사무[br]竹下 勇 || 오카다 게이스케[br]岡田啓介 || 이데 켄지[br]井出謙治 || || 아보 키요카즈[br]安保清種 || 카토 히로하로[br]加藤寛治 || 타니구치 나오미[br]谷口尚真 || 햐쿠타케 사부로[br]百武三郎 || 오오스미 미와오[br]大角岑生 || 야마모토 에이스케[br]山本英輔 || || 야마나시 카츠노신[br]山梨勝之進 || 고바야시 세이조[br]小林躋造 || 노무라 기치사부로[br]野村吉三郎 || 스에쓰구 노부마사[br]末次信正 || 나카무라 료조[br]中村良三 || 타카하시 산키치[br]高橋三吉 || || 후지타 히사노리[br]藤田尚徳 || [[요나이 미쓰마사]][br]米内光政 || 햐쿠타케 겐고[br]百武源吾 || 카토 타카요시[br]加藤隆義 || 하세가와 기요시[br]長谷川清 || 오이카와 고시로[br]及川古志郎 || || 시마다 시게타로[br]嶋田繁太郎 || 요시다 젠고[br]吉田善吾 || 도요다 데이지로[br]豊田貞次郎 || 도요다 소에무[br]豊田副武 || 곤도 노부타케[br]近藤信竹 || 타카스 시로[br]高須四郎 || || 노무라 나오쿠니[br]野村直邦 || 사와모토 요리오[br]沢本頼雄 || 엔도 요시카스[br]遠藤喜一 || [[나구모 주이치]][br]南雲忠一 || 다카기 다케오[br]高木武雄 || 야마가타 마사쿠니[br]山縣正郷 || || 쓰카하라 니시조[br]塚原二四三 || [[이노우에 시게요시]][br]井上成美 || 시오자와 코이치[br]塩沢幸一 || 이토 세이이치[br]伊藤整一 ||<-2> ||}}} || ||<-6> [[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7-collar.svg.png|width=30]] {{{#ffffff '''해군중장''' }}} || ||<-6> [[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5-collar.svg.png|width=30]] {{{#ffffff '''해군소장''' }}} || == 편제 == ||<-5>
{{{#ffffff '''관청''' }}} || || [[대본영]] || [[해군성#s-3.3|해군성]] || 군령부 || 함정본부 || 항공본부 || ||<-5> {{{#ffffff '''지방조직 / 작전부대''' }}} || || [[진수부]] || 경비부 || 요항부 || [[일본 해군 항공대|해군 항공대]] || 해군 육전대 || ||<-5> {{{#ffffff '''함대''' }}} || || [[연합함대#s-2|연합함대]] || 북동방면함대 || 중부태평양함대 || 남동방면함대 || 남서방면함대 || || 제10방면함대 || 지나방면함대 || [[제1기동함대(일본군)|제1기동함대]] || 제1견외함대 || 제2견외함대 || || 상비함대 || 남청함대 || 남견함대 || [[제1함대(일본군)|제1함대]] || 제2함대 || || 제3함대 || 제4함대 || 제5함대 || 제6함대 || 제7함대 || || 제8함대 || 제9함대 || 항공함대 || 제1항공함대 || 제2항공함대 || || 제3항공함대 || 제5항공함대 || 제10항공함대 || 제11항공함대 || [[수뢰전대]] || || 해상호위총사령부 || 특설호위선단사령부 || 해상호위대 || 해군총대 || 연습함대 || ||<-5> {{{#ffffff '''군사학교''' }}} || ||<-5> {{{#ffffff '''해군성소관학교''' }}} || || [[일본해군병학교|해군병학교]]★ || 해군경리학교★ || 해군기관학교★ || 해군군의학교 || 해군대학교 || ||<-5> {{{#ffffff '''진수부소관학교''' }}} || || 해군포술학교(제1교, 제2교) || 해군수뢰학교 || 해군잠수학교 || 해군공학학교 || 해군통신학교 || || 해군항해학교 || 해군기뢰학교 || 해군공작학교 || 해군전측학교 || 해군기상학교 || || 해군위생학교(제1교, 제2교) ||<-4> ★: 해군3교(海軍三校) || == 해군구 == 1938년 시점인 해군구의 구역, 군항, 요항목록 ||
{{{#ffffff '''해군구''' }}} || {{{#ffffff '''관할 진수부''' }}} || {{{#ffffff '''육상구역, 해상구역은 동일 진수부의 관할''' }}} || {{{#ffffff '''해상구역의 관할''' }}} || {{{#ffffff '''육상구역의 관할''' }}}[* 진한글씨는 해상이 없는 행정구역 ] || {{{#ffffff '''군항''' }}} || {{{#ffffff '''요항부''' }}} || || {{{#ffffff '''제1''' }}} ||요코스카 진수부 ||가라후토, 홋카이도, 아오모리, 이와테, 아키타[br]미야기, 후쿠시마, 이바라키, 지바, 도쿄[br]가나가와, 시즈오카 ||아이치, 미에 ||야마가타, 니가타, '''도치기, 군마[br]사이타마, 야마나시, 나가노''' ||요코스카 ||오미나토(아오모리) || || {{{#ffffff '''제2''' }}} ||구레 진수부 ||와카야마, 오사카, 효고, 오카야마, 히로시마[br]야마구치,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교토[br]돗토리, 시마네, 도쿠시마, 고치, 에히메[br]가가와 ||야마가타, 니가타, 오이타[br](미야자키[* 아리아케 만을 제외한 미야자키 현의 해상 ]), (후쿠오카[* 무나카타군 및 온가군, 이동해상 ]) ||아이치, 미에, '''기후, 나라, 시가''' ||구레 ||도쿠야마(야마구치)[br]마이즈루(교토) || || {{{#ffffff '''제3''' }}} ||사세보 진수부 ||가고시마, 사가, 나가사키, 구마모토[br]오키나와, 한반도, 타이완 ||(미야자키[* 제2 해군구에 포함되지 않은 해상 ]), (후쿠오카[* 미야자키현의 해상의 가운대 아라아케만포함 ]) ||오이타, 미야자키, 후쿠오카 ||사세보 ||진해(한반도)[br]마궁(호코청) || || {{{#ffffff '''관동주''' }}} ||사세보 진수부 ||관동주 및 해상 || - || - || - ||뤼순커우(관동주) || || {{{#ffffff '''남양''' }}} ||요코스카 진수부 ||남양군도 위임통치구역 및 해상 || - || - || - || - || == 육전대 == ||[[파일:external/www.warlordgames.com/Rikusentai-_300_.jpg|width=100%]]|| 해군 육전대(海軍陸戦隊) 혹은 육전대(陸戦隊)는 일본 해군에서 운용한 지상전 부대이다. 이들은 의화단의 난, 러일전쟁, 칭다오 포위전 등에서 활약했으며, 본래 있었던 일본 해병대가 현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지된 후부터는[* 이 당시의 해병대는 오늘날의 상륙전을 담당하는 해군 예하 부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승선 전투를 담당하는 부대를 가리킨다.] 해군의 지상전을 수행하는 유일한 부대가 되었다. 육전대는 상시 편제된 것이 아니고 해군 함정 승조원을 차출해 임시로 구성하는 부대였으나, 진수부를 비롯한 해군 육상기지들에 설치된 "해군특별육전대"는 상설 부대였다. 해군특별육전대에는 공정부대가 있었고 1942년에 일본군 첫 공수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해군특별육전대 외에도 경비대, 방공대, 근거지대 등의 특이한 육전대들이 대거 있었다. 육전대는 해군 장교들 사이에선 [[좌천]]되는 곳이었고, [[사병]]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분위기 험악하기로 유명한 일본 해군 내에서도 [[똥군기]]가 심한 축에 들었고, 사기도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육군한테 질 수 없다 마인드로 인해 훈련은 빡센 편이었으며 그에 따라 해군육전대의 임무가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다. 1943년부터 조선인을 지원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군이 이들을 집중 배치한 곳도 육전대였다. 소수의 인원이 기지 경계부대 및 지원부대나 항공부대에도 배치됐다. 해군에선 조선인들의 사보타주 등을 우려, 함선 근무는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비단 조선인만은 아니라서, 순혈주의가 강했던 일본 해군은 함선에는 무조건 일본인 수병만을 태웠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 [[건군기]](建軍期)에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자 일본군 출신 인사들도 해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자 해군에서 해병대 소속으로 대거 전환했는데, 위에 서술한 것처럼 일본군 출신은 함정 근무자가 전무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함정 운용을 다시 가르치는 것보다 잘하던 육전을 맡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때문에 해병대에는 해군과 달리 일본군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육/공군 마냥 일본군의 잔재가 많이 남았고 현재까지 골치를 썩인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해병대/악습]] 문서 참조. 해군도 악습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본군으로부터 계승된 것은 아니며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해군이야말로 일본식 용어를 제일 많이 쓰는 군종인데, 이건 해군의 축이었던 상선사관들이 일본식 용어에 익숙해졌던 탓이었다. 지금도 선박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본식 용어를 많이 쓴다. == [[일본 해군 항공대|항공대]] == [include(틀:2차 세계대전/일본 항공병기)] 일본군은 [[항공모함]] 등의 이유로 항공부대를 운용했다. 1904년에 최초 기안이 검토됐고 풍선을 운용하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정찰이 필요하단 이유로 1912년에 해군항공기술연구회가 설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2,900대의 항공기를 운용했다[* 총합이 2,900대인 것이 아니라, 항공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을 때의 운용량이다. 저 시점에도 예비 전력을 합치면 최소한 4,000대며, 2차 대전기 일본이 생산한 해군용 항공기의 총합은 '''10,000기''' 정도였다.] 또한 항공대 내에서도 역할별로 받는 혜택과 차별이 달랐다. 조종사 같은 고급 인력은 많은 월급과 복지를 받았지만 전시 중에는 그 누구보다 가혹하게 살아야 했다. 하루평균 8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비행해야 해서 비행기 내부에는 오물과 토사물이 가득했으며[* 일본은 태평양 전쟁 후반부로 갈 수록 미국에게 많은 섬과 비행장을 빼앗기기고, 일본 상부도 비행기 항속거리 늘리는데에만 급급하지 정작 조종사들이 긴 항속거리를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안 생각했기 때문이다.] 졸음운전으로 항공모함에 착함하기 전에 공중 사고가 일어나는 것도 빈번했다.[* 이걸 해결하겠다고 각성제까지 먹여댔는데, 각성제의 정체는 바로 [[필로폰]]이었으며 현재도 마약으로 분류되는 만큼 계속 먹여서 좋을 건 별로 없었다.] 또한 [[진주만 공습]] 같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하루종일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절대 좋은 보직은 아니였다. 정비병 같은 비전투 요원은 은근한 멸시와 차별이 있었으며 그렇다고 마냥 쉬운 업무는 아니였다. 시간이 날때마다 함재기에 수백KG짜리 폭탄이나 어뢰를 다는 연습을 하고 또 배에 불이 났을때에 진압하는 훈련을 하는 등 굉장히 고되었다. 그나마 위안점으로는 육군과는 다르게 밥과 시설이 좋았다는 것. 해군이 워낙 고된일 이기에 귀하디 귀했던 쌀밥을 주거나 설탕 생산량도 적은데 싹싹 긁어 모아 별사탕을 만들어 주는 등, 육군에 비해서는 훨씬 좋았다. 게다가 조종 뿐 아니라 기체 정비 등의 기술은 민간에선 쉽게 취득하기 힘든 고급 기술이라 전역 후 일자리를 구하기 쉬워, 신병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은 편이었다. == [[군사경찰|해군특별경찰대]] == [include(틀:세계의 군사경찰)] '''海軍特別警察隊''' (かいぐんとくべつけいさつたい) 해군특별경찰대는 구 일본해군이 태평양전쟁 당시에 만든 군사경찰대다. 점령지의 [[군사경찰]] 활동을 담당하여 해군 병사들의 범죄행위와 수사, 반일본적인 현지인의 조사 및 취급 등 방첩활동을 담당한 기관으로, 약칭은 특경(特警) 혹은 특경대(特警隊)로쓰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일본 제국 육군/헌병|육군 헌병]]이 해군의 [[군사경찰]]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에는 육군형법과 해군형법, 육군군법회의와 해군군법회의가 따로 있었다. 해군에는 [[군법무관|법무]] 병과는 따로 있었지만 헌병 병과는 없었는데, 해군군법회의법 제73조 제1항과 제77조 제1항에 따라 해군 헌병 [[수사관]]에 해당하는 해군사법경찰관/해군사법경찰사는 해군 부대에 배치된 육군 헌병이 담당했다. 솔로몬 전역에 [[해군육전대]]로 참전했던 후쿠야마 다카유키 해군 대위의 회고록 《솔로몬 전기》에는 육군 헌병에 대한 해군 장병들의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장교들조차 누더기와 [[맨발]] 수준의 상태로 지내며 [[기아]]와 [[말라리아]]로 고통받는 일선의 열악한 전황 속에서도, 헌병들은 좋은 피복에 살집 있는 풍채를 보이며 위화감을 자아낸다. 후쿠야마의 부하들은 기아를 견디다못해 원주민의 작물을 해치다가 이를 제지하는 선무반에게 하극상을 벌인 일로 헌병대에 연행되었는데, 후쿠야마는 선처를 청하고자 헌병 관계자를 방문하였다가 자신들과 대비되는 그들의 좋은 상태에 놀란다. 헌병 관계자는 하사관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장교인 후쿠야마에게 고압적인 반말로 응대하며, 심성이 굳지 못하고 부하 관리도 똑바로 못하는 후쿠야마를 꾸짖지만, 정작 후쿠야마는 헌병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부하들이 잘못될까 두려워 항의조차 못한 채 '''존댓말'''로 거듭 선처를 부탁한다. 육군의 헌병이 해군이라고 유독 과하게 군기를 단속하거나 했을 것 같으나, 의외로 육군 내에서도 헌병들은 자신들을 반 독립적인 조직처럼 인식해 비헌병 육군들과 큰 유대감이 없어 육해군 모두 비교적 공평하게 --악독하게 --대한 편이었다. 애초 육군 헌병들은 관할 지역의 육해군 지휘관과 법무관의 지휘하에 움직이기 때문에, 관할권이 아닌 부대의 육군보단 속해 있는 부대의 해군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암살 위협에 시달릴 때에도 그를 경호한 것은 해군육전대의 [[장갑차]]와 육군 헌병이었으나, 해군 관계자들이 딱히 헌병들이 육군 출신이라 경호를 허술히 하거나 배신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심지어, [[2.26 사건]] 직전에는 거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헌병 측이 이를 소속군인 육군이 아닌 해군 측에 먼저 넘기기도 했다. 해군이 육군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군사경찰]]조직을 따로 창설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난 이후인 1942년의 일이다. 점령지가 늘어남에 따라 헌병을 보내야 할 곳도 늘었는데, 육군에 헌병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도 헌병대의 증원에는 한계가 있어 업무 공백이 발생, [[군사경찰]] 업무를 일일이 육군 헌병대에게 의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육군 헌병대는 해군의 독자적인 [[군사경찰]] 조직 창설에 대해-- 지들이 역량 딸려서 사람 못 보내주는 건 생각도 않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불만을 드러냈다]]. 1942~1943년경 제 2 남방함대, 제 4 남방함대 에서는 해군특별[[경찰]]대를 만들었다.[* 이하 내용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rejet&logNo=110184318855&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블로그]]에서 다이헤이 출판 <해군특별경찰대> 재인용] 현지 반일활동 감시 및 체포를 담당하는 [[방첩기관]]으로서의 역할과 해군 [[장병]]들의 범죄 수사를 담당했다. 현지인 밀정, [[통역]]([[군무원|군속]]),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해군에서 군사경찰 업무를 맡은 게 처음이라 군기 단속 외 수사 능력은 낮았다. 그래서 가급적 경찰 출신자를 선발했다. 단 존속 기간이 패전으로 인한 해군 해체 덕에 3년에 불과해, 이런 약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해군특별경찰대는 '特警'이라는 완장을 찼다. 순찰할 때에는 권총을 휴대했다. 권위 확보 차원에서, 이들은 [[수병]]이라 해도 병조(해군 하사관)의 피복을 착용했다. 행정적 구심점인 육군헌병사령부를 따로 둔 헌병과 달리, 특경대는 별도의 사령부 없이 각 함대 직할로 분산돼 있었다. 또한 육군과 달리 별개의 특기를 만들지 않고, 차출된 인원들이 자신의 [[서류]]상 [[직별]]을 그대로 유지한 채 특경대 업무를 보았다. 특경대 또한, 현지에서 육군 헌병대처럼 전쟁 범죄를 저질러 전후 기소돼 처벌받은 사례가 꽤 된다. 위안부 모집에도 폰티아낙 특경대장 이하 13명이 강제매춘에 동원한 죄로 기소되었는데, 한편 특수한 사례로서 전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네덜란드]]에 대항해 반식민지 운동에 참가한 행위로 해군 특경대원 3명이 처벌되기도 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일본 제국 육군/헌병, version=174, paragraph=4)] == 일본 해군이 보유했던 군함 목록 == [include(틀:1차 세계대전/일본 함선)] [include(틀:2차 세계대전/일본 함선)] 기타 함선은 [[일본군/무기#s-3|해당 문서]] 참조. == 참전 이력 == [[메이지 덴노]]가 [[메이지 유신|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고 보신전쟁부터를 기점하여 일본제국 해군 참전이력이다. * [[보신 전쟁]](戊辰戦争)1868년~1869년 * 아와 해전(阿波沖海戦) * 미야코 해전(宮古湾海戦)1869년 5월 6일 * 사족 반란(士族反乱)1874년 2월 ~ 3월, 1876년 10월 ~ 12월, 1877년 2월 ~ 9월 * [[사가의 난]](佐賀の乱)1874년 2월 1일 ~ 3월 1일 * [[세이난 전쟁]](西南戦争)1877년 1월 29일 ~ 1877년 9월 24일 * 타이완 침략(臺灣侵略)1874년 5월 * [[청일전쟁]](日清戦争)1894년 7월 25일 ~ 1895년 11월 30일 * [[청일전쟁#s-4.1.1|풍도 해전]](1894년) * [[황해 해전]](1894년) * [[청일전쟁#s-4.2|웨이하이 전투]](1895년) * [[을미 전투]](1895년) * [[러일전쟁]](日露戦争)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 여순항 봉쇄작전(旅順港閉塞作戦)1904년 2월 8일 * 여순항 해전(旅順口攻撃)1904년 2월 8일 * 제물포 해전(仁川沖海戦)1904년 2월 9일 * [[황해 해전]](黄海海戦)1904년 8월 10일 * 울산 해전(蔚山沖海戦)1904년 8월 14일 * 코르사코프/소야 해전(コルサコフ海戦, 宗谷沖海戦)1904년 8월 20일 * [[쓰시마 해전]](対馬沖海戦, 日本海海戦)1905년 5월 27일 * [[제1차 세계 대전]] * 수송호위임무 * [[중일전쟁]] * 충칭 대공습(重慶爆撃)1938년 2월 18일 * 난창 전투(南昌作戦)1939년 5월 9일 * [[난징 전투]](南寧作戦)1939년 11월 15일 * 쿤륜관 전투(崑崙関の戦い)1939년 12월 17일 * 빈양 작전(賓陽作戦)1940년 1월 28일 * [[태평양 전쟁]] * 진주만 공습(真珠湾攻撃)1941년 12월 7일 * 말레이 해전(マレー沖海戦)1941년 12월 10일 * 뉴기니 해전(ニューギニア沖海戦)1942년 2월 20일 * 발릭파판 해전(バリクパパン沖海戦)1942년 1월 24일 * 엔도우 해전(エンドウ沖海戦)1942년 1월 27일 * 자와 해전(ジャワ沖海戦)1942년 2월 4일 * 다윈 공습(ダーウィン空襲)1942년 2월 19일 * 발리 해전(バリ島沖海戦)1942년 2월 20일 * 수라바야 해전(スラバヤ沖海戦)1942년 2월 27일 * 바타비야 해전(バタビア沖海戦)1942년 2월 28일 * 스리랑카 해전(セイロン沖海戦)1942년 4월 5일 * 피낭 해전(ペナン沖海戦)1945년 5월 16일 * 산호해 해전(珊瑚海海戦)1945년 5월 4일 * 비스마르크해 해전(ビスマルク海海戦)1943년 3월 2일 * 지야푸라 전투(ホーランジアの戦い)1944년 4월 22일 * 타케이치 선단(竹一船団)1944년 4월 17일 * 비악섬 전투(ビアク島の戦い)1944년 5월 27일 8월 20일 * 혼작전(渾作戦)1944년 6월 2일 ~ 13일 * 미드웨이 해전(ミッドウェー海戦)1942년 6월 5일 * 제1차 솔로몬 해전(第一次ソロモン海戦)1942년 8월 8일 * 이오지마 전투(硫黄島の戦い)1945년 2월 19일 * 텐고 작전(坊ノ岬沖海戦)1945년 4월 7일 == 상선사관에 대한 이해심 부족 == 밑에서 후술하겠지만 당시 일본 해군은 해군병학교 출신들이 해군을 이끌도록 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그들의 우월주의, 선민사상, 엘리트의식이라는 것에 빠져 있기 때문 당시 조선인, 부라쿠민, 대만인, 류큐인 같은 이런 소수 계층은 당연히 받아주지 않으며 같은 설령 받아준다 해도 해군병학교가 아닌 고등상선학교 출신이나 육군 출신([[삼식잠항수송정]] 승무원)인데 당연히 이들을 무시한다. 그나마 육군은 근본 자체가 다르고 본인들 상황 때문에 예외로 치지만 상선사관은 자신들의 우월의식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상선사관 으로 구성된 해군 예비생들은 지휘권을 갖지 못해 해군병 학교 출신들에 비해 전사자 비율이 매우 컸다. 다른 나라의 상선사관은 하다 못 해 장교로 받아 주는데 이런 전략 의식에 이해심이 없던 일본 해군은 이마저도 하지 않았던 것. 물론 해군병 학교 출신들의 선민사상도 한 몫 했다. 당연히 이들은 콧대가 높았으며 자존심과 오만함이 충만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일본 해군은 전후 [[해상보안청]]과 [[해상자위대]]로 찢어졌다. == 파벌 == [[일본 육군]]과 마찬가지로 파벌이 많은데 [[황도파]]처럼 [[친미]], [[친영]] 으로 분류되는 조약파(대표적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츠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 [[노부히토]]), 반대로 반미에다 [[함대결전사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조약에 대해 앙심을 품고 전쟁을 부르짖는 함대파가 있었다. 근데 그 함대파 내부에서도 파벌이 갈리는데, 주로 [[거함거포주의]]를 모토로 삼는 전함파, 어뢰를 많이 이용하자는 수뢰전파, 해군 내에서 보병전을 중심으로 하는 육전대파, [[야마모토 이소로쿠]]처럼 항공기를 이용한 항모를 쓰자고 주장하는 항공파, 자폭 병기로 닥치는 대로 닥돌해 자폭하자는 옥쇄파, 육군과 잘 해보자는 육군파도 있다. 그리고 학교 출신에 따라서 구분되는데 나름 자존심과 엘리트 의식이 있는 해군병학교 출신으로 이루어진 정규 해군 사관들과 고등상선학교 출신으로 구성되어 지휘권이 없어 전사자가 더 많았던 해군 예비생들이 있다. 이들 2개의 파벌은 전후 각각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으로 분열된다. == 관련 문서 == * [[전범]] * [[니콘]]: 니콘의 탄생이 일본 해군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해군은 고성능 잠망경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부응한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가 출자한 것이 니콘.[* 당시의 사명은 '일본광학'이었다.] 실제로도 세계대전 연간에 해군에 잠망경이나 [[사격통제장치|사통장치]]용 렌즈 등 군수납품이 활발했다. * [[니쿠쟈가]] * [[카레라이스]] * [[라무네]] * [[라임색 전기담]] * [[야스쿠니 신사]] * [[역시 일본 해군은 강해]] * [[욱일기]] *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 [[일본해군병학교]] * [[일본 해군 항공대]] * [[연합함대]] * [[일본 해군의 포탄]] * [[함대 컬렉션]]: 일본군에서 활약했던 함선을 모티브로 의인화 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온라인 게임. 이 게임의 성공으로 인해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군함들을 의인화 한 캐릭터가 나오는 소위 코레류 게임들이 나오게 된다. * [[해군반성회]] * [[해군선옥론]] * [[일본군/무기체계/해군]] * [[마루 계획]]: 일본 해군의 군함 건조계획을 총칭하며, 일본어로는 丸-계획이라고 불렀다. * [[月月火水木金金]] * [[88함대]] *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분류:일본 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