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현설}}}'''[br]'''李鉉卨'''}}}}}} || || '''자 / 호''' ||은경(殷卿) / 추산(秋山) || || '''본관''' ||[[재령 이씨]][* 영해파(寧海派)-석계공파(石溪公派) 23세 현(鉉) 항렬.] || ||<|2> '''출생''' ||[[1894년]] [[6월 15일]] || ||[[경상도]] [[영덕군|영해도호부]] 서면 신리[br](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08번지) || || '''사망''' ||[[1952년]] [[5월 24일]][* 재령이씨영해파보 권3 17쪽에는 1961년 1월 23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향년 57세) || ||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이수각(1872)|이수각]]은 작은아버지이다. == 생애 == 1894년 6월 15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신리(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08번지)에서 아버지 이수철(李壽喆, 1852 ~ 1925. 11. 9)과 어머니 [[한양 조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이수인(李壽仁, 1850 ~ ?. 10. 23)에 입양되었다. 이후 인근의 창수면 오촌동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784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거주하다가]] 신기동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구장을 역임했다. 1919년 3월 18일, 둘째 작은아버지 [[이수각(1872)|이수각]], 20촌 지간의 족형(族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97|이현우]](李鉉祐)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73|권재형]](權在衡) 등과 함께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미리 제작한 대형, 중형, 소형의 [[태극기]]를 지참해 영해면으로 가던 도중, 창수동 주민들 중에 일제의 도로공사로 인해 논밭을 강제로 수탈당한 농민이 많다는 점을 들어 창수동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시위대의 수는 곧 15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현설은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고, 그날 오후 4시 창수면 헌병주재소에 이르자 이때의 시위군중은 4백여명이었다.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창수면 객사 및 주임순사 [[다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 1907년 8월 [[http://db.history.go.kr/id/gbtg_1907_10_02_b00001_00010|이사청]](理事廳) [[순사]]를 역임했고, 1919년 6월 14일 영덕경찰서 순사로서 경상북도경찰부장으로부터 순사정근증서를 [[http://db.history.go.kr/id/gb_1919_07_04_a20690_0200|몰수당했다]].]의 숙소와 소유물,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 등의 비품을 파괴하고 제복과 제모를 빼앗았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탈취하여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식기까지도 완전히 파기하고, 영해공립보통학교(現 영해초등학교)로 가서 교사 및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오후 7시에 이르러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본 제국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5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55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형사사건부]]에는 6월 6일로 적혀 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죄|소요]]·[[공무집행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죄|상해]]·보안법 위반·[[주거침입]]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55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형사사건부]]에는 징역 1년 6개월형으로 오기돼 있다.]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0&evntId=0034987827&evntdowngbn=Y&indpnId=000002627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82&evntId=0034984571&evntdowngbn=Y&indpnId=000001607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4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9327&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형기는 그대로 유지돼]]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9년 11월 13일 창수면 신리동2구 식산계(殖産契)[* 당시 식산계 사무소는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17번지에 있었고, 부주사(副主事)는 신리리 299번지에 살던 9촌 삼종질(三從姪) 이연호(李連浩, 1881 ~ 1963. 2. 22)였다.]의 주사(主事)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고, 1952년 5월 24일 별세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재령 이씨]][[분류:1894년 출생]][[분류:195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