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분류:은전궁 종주]][[분류:1886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은전궁 주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05662, #3e7080 20%, #3e7080 80%, #305662); color: #FFD400" '''은전궁 3대 궁주'''}}} || ||<-2> '''{{{#fff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 실제로는 조선 선조의 13대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할아버지 완평군이 장조(사도세자)의 서3자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적하였기에, 은전군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이었던 장조(사도세자)를 기준으로 적었다. 수정하지 말 것.][br]{{{+1 이헌용 | 李憲鎔}}}}}}''' || || '''{{{#ffffff 이름}}}''' ||<(> 이헌용 (李憲鎔) || || '''{{{#ffffff 본관}}}''' ||<(> [[전주 이씨]] [[은전군]]파 || || '''{{{#ffffff 출생}}}''' ||<(> [[1886년]] [[8월 12일]] || || '''{{{#ffffff 사망}}}''' ||<(> [[1921년]] || || '''{{{#ffffff 생부}}}''' ||<(> [[인양군]] || || '''{{{#ffffff 적모}}}''' ||<(> [[해주 오씨]]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현손이며, [[인양군]] 이재근의 [[서자]]이자 [[외아들]]이다. 생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계동이다. 원래 이헌용의 가계는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다. 이헌용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 왕실 직계와 갈라진 지 300년 가까이 지난 때였기에 이헌용은 원칙적으로 [[종친]]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헌용의 할아버지 [[완평군]] 이승응이 1860년([[철종(조선)|철종]] 11년)에 [[사도세자]]의 [[서자]] [[은전군]]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이헌용은 태어날 때부터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작호]]는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상 이헌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 [[추존]] 왕 포함.]이었던 사람은 5대조 [[사도세자|장조(사도세자)]]인데,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 생애 == 1886년([[고종(대한제국)|고종]] 23년)에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 [[인양군|이재근]]을 잃었고, 생가 숙부 이재현[* 완평군의 2남. 완평군의 생가([[경창군]]파) 동생 이낙응의 양자로 출계했다. 그래서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았을 때, 형 [[인양군|이재근]], 동생 [[의양군|이재각]]은 [[황족]]으로서 봉군되었지만 이재현은 못 받았다.]의 손에서 자랐다. 1904년([[광무]] 7년) 2월 6일에 판임관 8등의 [[장릉(김포)|장릉]][* [[인조]]의 부모 [[정원군|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참봉]]으로 임명받았으나[[http://sjw.history.go.kr/id/SJW-K40120210-00400|#]] 하루 뒤에 물러났다.[[http://sjw.history.go.kr/id/SJW-K40120220-00300|#]] 그해 12월 19일에는 시종원좌시어가 되었으나[[http://sjw.history.go.kr/id/SJW-K41110130-00800|#]] 3일 뒤에 면직당했다.[[http://sjw.history.go.kr/id/SJW-K41110160-00500|#]] 이듬해인 1905년(광무 9년) 3월 2일에는 6품으로 품계가 높아졌다.[[http://sjw.history.go.kr/id/SJW-K42010270-01500|#]] === 행실 === * 꽤 방탕한 삶을 살았던 듯하다. * 1909년([[융희]] 3년) 음력 11월 경에 계심(桂心)이란 [[기혼]] 여성을 300환 수표를 주고 [[첩]]으로 삼았는데 그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1910년(융희 4년) 7월에 계심의 남편이 돈을 찾으려고 [[일본인]] 변호사를 고용해 소송을 걸었다.[* 출처: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일자 기사.] * 재산문제로도 시끄러웠다. 다음 내용은 1913년 1월 18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패자(悖子)의 행위 전말〉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br][br]1909년([[융희]] 3년)에 [[완평군]]이 별세한 후 [[은전군]] 가문의 봉사손을 정하기 위해 문중 사람들이 모였다. 이헌용이 장손이라 그가 제사를 물려받는 것이 맞았으나, 서출이라서 승적[* 承嫡. [[서자]]를 [[적자]]로 올리는 것. 적모의 양자로 입적하는 형식을 취한다.]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대부분 문중 사람들과 이헌용의 적모([[인양군|인양군 이재근]]의 부인) 오씨는 "헌용이가 비록 혈족이지만 행실이 부랑방탕하여 후계로 삼으면 집안 형편이 나빠질 것이다. 승적시켜 제사를 받들게 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이재근의 둘째동생 [[의양군|의양군 이재각]]이 [[제사]]를 맡기로 했으나, 이헌용을 키웠던 숙부 이재현이 "이헌용이 나이 들면 정신 차릴 것이니, 행실을 단속하고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재현의 도움으로 이헌용은 겨우 오씨 부인의 아들로 승적했고 은전군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았다.[br][br]그러나 숙부 이재현의 약속이 무색하게도,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다|이헌용은 전혀 갱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방탕해졌다. [[상복]]을 입은 채 주사창가를 드나들었고, [[빚]]까지 져서 이재현이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이재현은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여러 번 혼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재산집행까지 당했는데 역시 이재현이 대신 물어주었다. 이재현은 이대로 가다간 [[완평군]]의 재산이 다 없어질까봐 걱정했고, 그래서 [[경기도]] [[안산시|안산군]] 동막리와 [[경기도]] [[과천시|과천군]] 당정리에 있는 이헌용이 소유한 [[집]]과 [[땅]]의 [[명의]]를 자신 이름으로 바꿨다. 이는 이헌용이 함부로 처분하지 못하게 막아둔 조치였다.[br][br]그러자 이헌용은 이재현이 자신의 [[재산]]을 [[횡령]]했다면서, [[일본인]] 키오(木尾) [[변호사]]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재현을 고발했다. [[패륜|자신을 키워준 삼촌을 재산 때문에 고발한 것]]. 이 소식을 들은 이재현의 동생 [[의양군|이재각]]은 몹시 분노했으나 감정을 억누르고 이헌용을 조용히 불러 "삼촌 조카 사이에 이러는 건 짐승만도 못하니 다음에 이야기해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이헌용은 "모든 재산을 내어주면, 회개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고, 이재각은 "절대 안 된다. 너한테 맡겼다가는 며칠 사이에 다 없앨 것 아니냐."고 반대했다. 그러자 이헌용은 "이렇게 못 믿으시니 [[안산시|안산]], [[과천시|과천]]의 [[논]]과 [[집]]에 대한 권리를 모두 주시면 어머니(해주 오씨) 앞에 바치겠다."고 말했다.[br][br]이재각은 "[[안산시|안산]] 쪽을 먼저주고 [[과천시|과천]]은 차차 주마"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헌용은 안산 땅에 대한 권리를 어머니에게 바치기는커녕, 어디론가 사라져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그와중에 또 일부 [[변호사]]들이 이 싸움에 끼어들어 사례금을 챙겨가려 했다. 이런 난잡한 싸움 끝에 결국 오씨 부인이 재산을 소유하기로 결정이 났다. === 사망 === 1921년에 35세로 사망했다. 장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 가족 == 부인은 [[양주 조씨]]로 학관 조병욱(趙秉郁)의 딸이다. 슬하에 친자녀가 없어 [[의친왕]]의 4남 이해직(李海直)[* 황실명은 이창(李鎗). 아명은 이창길(李昌吉).]이 이헌용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갔다. 그런데 족보상으로만 양자가 된 것이고 법적으로 이헌용의 호적에 들어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쭉 의친왕의 장남으로 되어있었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70200239107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0-07-02&officeId=00023&pageNo=7&printNo=15143&publishType=00010|1970년 7월 2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대법원 판결에 의하여 이창이 의친왕의 호주를 상속하였다고 되어있다. 이해직은 조의혜와 혼인하여 이광주(李光柱), 이은주(李銀柱), 이일주(李一柱, 1938~?), 이석주(李石柱, 1943~)를 낳았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덕용, versio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