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학로}}}'''[br]'''李學魯'''}}}}}} || || '''자 / 호''' ||성숙(性叔) / 후은(後隱) || || '''본관''' ||[[벽진 이씨]][* 판서공파(判書公派)-토동백파(土洞伯派) 32세 '''로(魯)''' 원(元) 운(雲) 우(愚) 항렬.] || ||<|2> '''출생''' ||[[1867년]][* 벽진이씨판서공파보 상권 6-27쪽에는 185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0월 8일]] || ||[[경상도]] [[영천시|영천군]] [[자양면]] 토동[br](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959번지)[* 인근의 용산리와 함께 [[벽진 이씨]] 집성촌이다.] || ||<|2> '''사망''' ||[[1933년]][* 벽진이씨판서공파보 상권 6-27쪽에는 1934년에 별세한 으로 기재되어 있다.] [[10월 10일]]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 || '''묘소'''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44번지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67년 10월 8일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토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959번지)에서 아버지 이정봉(李楨鳳, 1828. 9. 29 ~ 1899. 1. 11)[* [[http://yeongcheon.grandculture.net/yeongcheon/toc/GC05101419|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는 李'''{{{+1 禎}}}'''鳳으로 표기되어 있다.]과 어머니 [[경주 김씨]](1845. 8. 7 ~ 1909. 2. 15)[* [[생원]] 김병섭(金秉燮, 1790 ~ ?)의 딸이다.]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벽진이씨판서공파보 상권 6-27쪽에는 이학로가 185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고, 아버지의 첫째 부인 [[문화 류씨]](1831. 10. 21 ~ 1864. 6. 4) 류동영(柳東英)의 딸 소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이때 조선·일본 양국간에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하여 그해 8월 1일부터 [[대한제국 군대해산|한국군이 해산되자]]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 8월 8일에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동 송하마을(現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 송하마을)에 거주하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762|박동의]](朴東義) 의병부대의 부장(副將)이 되어 경상도 전역에 걸쳐서 의병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8월 18일에는 그의 향도관(響導官, 길잡이)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860|서병희]](徐炳熙)와 함께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해 9월에는 대장이 되어 경상남도 곳곳을 전전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했다. 1909년 1월에는 산청군 시천면에서 서병희와 함께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으로 이동해 그곳에 살던 일본인 가옥을 습격하여 소각했고, 그곳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격퇴했다. 그후 그의 부하로 활약하였던 서병희는 그해 2월 독립해 자신의 의병부대를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2월 22일에는 [[합천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했고, 4월 14일에는 함안군 [[군북면(함안)|군북면]] 장터에서 일본인을 응징하고 일본군 및 함안경찰서에 격문을 발송했다. 6월 13일에는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칠원읍|칠원면]]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습격해 총과 [[일본 군도]]를 노획했으며, 일본인 상인 [[우치다]] 젠스케(內田善助)를 습격해 다치게 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진주군 [[정촌면]] [[가좌동(진주)|가좌동]](現 [[진주시]] [[가좌동(진주)|가좌동]])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재무주사를 처단하고 권총과 다수의 서류를 압수했다. 11월 1일에는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장터에서 일본인을 사살했고 12월 10일에는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지리산]] 어느 곳에 무기를 숨겨 묻어 두고,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망한대(望漢臺)를 세우고 시를 읊으며 망국에 대한 슬픔을 노래했다.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이후 흰 갓과 소복을 입으며 생활했다. 이후 1933년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벽진 이씨]][[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1867년 출생]][[분류:193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