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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08a56 0%, #bf622e 20%, #d08a56 80%, #bf622e)" {{{#white '''{{{+2 이쾌대}}}[br]{{{-1 李快大 | Lee Qoede}}}'''}}}}}}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쾌대화가.png|width=100%]]}}}|| || '''{{{#white 본관}}}''' ||[[경주 이씨]][* [[http://aks.ai/GC40008284|#]]. 42세 건(鍵)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형 이여성(李如星)의 본명이 이명건(李命鍵)으로, 항렬자를 썼다.] || ||<|2> '''{{{#white 출생}}}''' ||[[1913년]] [[1월 16일]] || ||[[경상북도]] [[칠곡군]] 상지면 상지리[br](現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 39번지)[*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0213010001740|#]]] || || '''{{{#white 사망}}}''' ||[[1965년]] [[2월 20일]] (향년 53세) || || '''{{{#white 직업}}}''' ||[[화가]] || || '''{{{#white 학력}}}''' ||신동공립보통학교 {{{-2 ([[전학]])}}} → [[대구수창초등학교|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 {{{-2 ([[졸업]])}}}[br][[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2 ([[졸업]])}}}[br][[무사시노미술대학|데이코쿠미술학교]] || || '''{{{#white 배우자}}}''' ||유갑봉 || [목차] [clearfix] == 개요 == ||
<-2><#bf622e> '''{{{#fff 주요 작품}}}''' || || [[파일:이쾌대자화상.jpg|width=100%]] || [[파일:2021041210475387075_l.jpg|width=100%]] || ||<#ddd>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ddd> '''부녀도''' || [[대한민국]] 근대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 시대의 [[목소리]]를 듣고 강렬한 서사시적 [[에너지]]를 표현한, 한국 사실주의 미술의 뿌리. [[인물]]을 위주로 현시대의 상황을 주제로 두는 그의 작품에서 [[르네상스]] 화풍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절묘한 응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서양]]의 고전적인 기법으로 [[인체]]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듯 하면서도, [[수묵화]]와 비슷한 필법으로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여 입체적인 명암은 자제되고 전체적으로는 [[그림]]이 평면적으로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서양과 [[동양]]의 기법을 혼합하여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특유의 한국적 리얼리즘을 탄생시킨 작가로 평가받는다. == 생애 == [[1913년]] [[1월 16일]] [[경상북도]] [[칠곡군]] 상지면 상지리(現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 39번지)에서 아버지 이경옥(李敬玉)의 2남 4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이선형(李善炯)은 일찍이 [[금부도사]]를 지냈고, 1890년([[고종(조선)|고종]] 27) 나이 80세가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7_09A_10A_00290_2003_141_XML|품계가 올랐다]]. 이후 1903년(고종 40) [[중추원]] 의관(議官)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05A_01A_00100_2006_196_XML|임용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군수를 지내고 삼만석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자였다. 1만 6000여㎡(5000평)에 이르는 그의 [[집]]에는 [[교회]], [[학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향의 신동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0살 때 [[대구광역시|대구부]]로 올라와 [[대구수창초등학교|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現 [[대구수창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28년 상경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야구]]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란 부모님이 야구 빼고 좋아하는 건 무엇이든지 하라고 했더니 뜻밖에 [[미술]]을 선택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때부터 화가가 되는 꿈을 지원해줬다고 한다. 서양화가 '[[장발(1901)|장발(張勃)]]'을 담임교사로 만나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3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화단에 데뷔하였다. [[일본]]으로 가기 전에 유갑봉과 결혼식을 올렸고, [[1934년]]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 후 일본에서 둘은 단란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이쾌대는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고, 아내의 [[초상화]]에서 시작된 인물화는 차츰 [[조선]]의 여성상으로 변화하였다.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제25회 '이과전'에 〈[[운명]]〉을 출품해 입선한 이후 3년 연속 입선하였다. [[1941년]] [[동경]]에서 이중섭, 진환, 김학준, 김종찬, 최재덕,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 서양화에 전통회화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했다. 특히 그림 속 주인공의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의 조화에 고심했다. [[전통]]에 대한 관심은 [[기생]]·[[지게꾼]]·[[김치]] 담그는 여인 등 조선 풍속과 더불어 [[부여]]·[[군산]]·[[금강산]] 등의 명소, [[무열왕릉]]·[[고구려]] 고분벽화 등 고대 유적이 담긴 [[엽서]]를 수집하고 이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좌익의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다가 스스로 이탈하였다. [[1947년]] ‘진정한 민족예술의 건설’을 표방하면서 김인승, 조병덕, 이인성 등 18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고 [[1949년]]까지 4회의 회원 작품전을 가졌다. [[1948년]] [[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여 대한민국 화단에 큰 영향 끼쳤는데, 이 때 시대의 역작 '군상시리즈'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의 인생이 뒤틀어진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이다. 만삭인 아내를 두고 갈 수 없어 서울에 남았다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김일성]], 스탈린이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부역을 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서울 수복 때는 반대로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1953년]] 포로 교환 때 월북했는데 가족이 있는 고향 남한 대신 북한을 선택한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서울에서의 초상화 강제부역과 친형인 '이여성'의 [[월북]] 등으로 남한에서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 우려했고, 또한 분단이 고착화 될 것을 예상치 못한 듯하다. >“아껴 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안방에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 >거제수용소에서 부인 유갑봉에게 보낸 편지. 북한에서는 조선미술가동맹 소속 화가로서 활동하면서,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에 〈삼일운동〉을 발표하고, 전국미술전람회에 〈농악〉을 출품하였다. 1958년 월북화가 김진항과 함께 [[중국]] 인민지원군 우의탑에 [[벽화]]를 제작하였고, [[1961년]]에는 국가미술전람회에 〈송아지〉를 출품해 2등상을 받았다. 먼저 월북한 친형 이여성(李如星)도 북한에서 민족적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하다가 숙청당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쾌대도 역시 53세인 [[1965년]] [[위천공]]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 기타 == * [[1988 서울 올림픽|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월북작가 작품에 대해 해금조치가 되기까지, 30년간 부인과 자식들은 이쾌대의 그림을 지켜왔다. 남편의 월북 이후 서울에서 [[포목점]]을 하며 자식들을 키운 유갑봉씨는 그림을 팔라는 [[수집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며, 작품을 [[경찰]]에게 압수당할까봐 [[신문지]]에 둘둘 말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손상된 그림은 자식들 가운데 유일하게 미술을 전공한 막내아들(이한우)이 복원해서 관리했다고 한다. * 이쾌대는 화가 [[김창열(화가)|김창열]]의 [[스승]]이다. 한 인터뷰에서 김창열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실]]과 [[끈기]]를 배웠지. 정말 존경했거든. 물방울 그리면서 선생님 영향을 내가 많이 받았구나 생각해. 우리 누가 움직이지 않고 하루종일 그림 그리나 내기하자 그러셨다고. 선생님이…”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701177.html#csidx70a482732237250b3216134a096d559|#]] * 그가 현실과 시대 정신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였는가는, [[도상봉]]의 작품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자]] 그림만 잔뜩 걸린 [[도상봉]]의 전시를 보고 와서 “그림은 참 잘 그렸지만, 이런 시절에 어떻게 도자기만 저렇게 그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했다고(...). [[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1913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분류:휘문고등학교 출신]][[분류:북한의 화가]][[분류:월북한 인물]][[분류: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