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이창수(동명이인))] || '''{{{#ffffff 이창수의 수상 및 영예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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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 중3임에도 이미 186cm이던 이창수는 군산고 농구부 코치의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선수제의를 받게 되고 군산고 입학 직후부터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군산고 시절 팀은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1987년 협회장기 4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이창수는196cm까지 쑥쑥 크면서 역시 고1때 농구를 시작했던 랭킹 1위 마산고 [[정재근(농구)|정재근]]을 비롯, 부산동아고 [[표필상]] 등과 함께 고교 센터 상위권을 다투었고 [[최부영]] 감독이 이끄는 경희대에 진학하게 된다. 탄력과 스피드가 별로라 '느림보센터'라 불리기도 했고 농구를 늦게 시작해서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경희대 진학후 [[최부영]] 감독의 혹독한 조련 끝에 기량이 점차 올라가면서[* 전매특허인 훅슛도 이 때부터 던지기 시작했다. 최부영 감독이 팔도 길고 손도 커서 훅슛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추천했다고 한다.] 3학년 때이던 [[1990-91 농구대잔치]]에서 한경기 25 리바운드라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김유택]]을 제치고 농구대잔치 2차대회 리바운드왕을 차지하기도 했고, 4학년에 이르러서는 동기 김영주(G,180cm)와 함께 [[최명도]](1년,G,180cm)-[[김현국]](3년,F,188cm)-[[장창곤]](1년,C,194cm) 등을 이끌며 만년 중위권이던 경희대를 연세대, 중앙대와 함께 대학 3강의 반열에까지 올려놓았다.[* 이때 경희대의 성적은 춘계/추계연맹전/MBC배 준우승, 전국체전 우승, 농구대잔치 3차대회(8강) 진출 등 모든게 창단이래 역대급 성적이었다.] 졸업반이 되던 해 신생 실업팀 SBS가 창단되면서 연세대, 중앙대의 졸업반 선수들을 싹쓸이함에 따라[* 연세대 [[정재근(농구)|정재근]], [[이상범(농구)|이상범]], 중앙대 남경원, [[표필상]] 등] 나머지 실업팀들에게 있어 이창수는 독보적인 랭킹 1위의 선수였고, 치열한 경합끝에 센터자원의 노쇠에 시달리던 [[서울 삼성 썬더스|삼성전자]]에 합류하게 된다. === 실업무대에서 프로 시기 === 실업무대 데뷔시즌인 [[1992-93 농구대잔치]]에서 기존의 노쇠한 센터진[* 국가대표팀 출신 김윤호(30세, 192cm)와 서대성(31세, 195cm)이 있었으나 둘다 부상에 시달렸다.]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삼성전자를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올려놓는데 기여한다.[* [[허재|허]][[강동희|동]][[김유택|택]]의 기아자동차에 져서 준우승.] 농구대잔치 종료 후 이창수는 [[정재근(농구)|정재근]], [[오성식(농구)|오성식]], 남경원, [[표필상]] 등과 나란히 상무에 입대하여 기존의 [[김상식(농구)|김상식]] 등과 함께 상무팀을 사상 최강 전력으로 만들었고, 이창수 본인은 주전센터로 뛰며 상무를 [[1993-94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까지 올린다.[*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농구)|이상민]]의 연세대에 져서 또 준우승.] 1994년 하반기에 제대한 이창수는 삼성전자에 합류하여 명지대 출신 루키 센터 [[박상관]](200cm)과 함께 공포의 더블포스트를 구축, [[1994-95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를 다시 한 번 결승에 올리면서 3년동안 소속팀을 바꿔가면서 3년 연속 결승전을 경험한 유래없는 선수가 된다.[* 이번에도 [[허재]]가 맹활약한 기아자동차에 지면서 3년 연속 준우승.] KBL 출범 직전인 1996년 선수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간염]] 진단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프로 원년시즌 및 1997-1998시즌까지 치료에만 몰두하였다. 프로 초창기 외인 수준이 낮았고 대부분의 팀이 1가드 1센터의 외인을 선발했던 상황이라 이창수 정도의 빅맨이면 충분히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었기에 아쉬움은 더 컸다.[* KBL 원년 시즌, 이창수가 빠진 [[서울 삼성 썬더스|수원 삼성 썬더스]]는 8팀 중 꼴찌를 차지하였다.] 완치 판정을 받고 복귀했을 때(1997-1998 시즌 막판) 나이가 이미 29세로, 주전도 아닌 백업센터로서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창수의 KBL 커리어는 이 때를 시작으로 무려 [[2011년]]까지 달리게 된다. 2002-2003 시즌을 앞두고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울산 모비스]]로 이적한 후[* 이 때가 33세였다.] 다른 팀들보다 어린 선수들이 모여있던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모비스]]의 '삼촌' 역할을 하면서 라커룸 분위기를 이끌었고, 2006-2007 시즌 울산 모비스가 파이널에서 우승하면서 이창수는 기존에 허재가 가지고 있던 "역대 최고령 챔피언"의 타이틀까지 가져오게 된다. 2009-2010 시즌을 앞두고 FA가 되면서[* 이 때가 만 40세.] 울산 모비스와의 협상이 결렬되었으나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자 창원 LG로 이적하였고 두 시즌을 더 뛰고 만 42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 국가대표 === 울산 모비스에 합류했던 첫 시즌(02-03) 34세의 나이로 03 하얼빈 아시아선수권 대표팀에 첫선발되어 대한민국을 중국에 이어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대표팀은 02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이 모두 빠진 상태였다.] 당시 팀에는 골밑자원이 이창수 외에 [[김주성(농구)|김주성]], [[하승진]], [[이규섭]] 밖에 없었는데 (하승진은 이때 겨우 고3이라 경험축적 차원에서 데려간 수준이었다.) 이창수는 결승전에서 헌신적인 스크린으로 외곽의 [[김병철(농구)|김병철]], [[이규섭]]이 엄청난 3점포를 뿜어내며 [[야오밍]]이 뛰던 최강 중국과 접전(96-106)을 펼치는데 일조했다. == 은퇴 후 == 은퇴 후 서울 삼성의 스카우트로 활약하다 [[2016년]]부터 모교 [[군산고등학교]]의 코치를 맡고 있다. 2016년 현재 군산고는 신민석(2학년, F, 200cm), 이정현(2학년, G, 188cm), 서문세찬(1학년, G, 183cm) 청소년대표 트리오[* 2015년 U-16 아시아대회 우승 및 2016년 U-17 세계대회 8강의 주역들이다.]의 활약속에 9월 추계연맹전 우승을 비롯 4월 협회장기 8강, 5월 연맹회장기 4강, 8월 주말리그 왕중왕전 4강, 10월 전국체전 동메달 등 군산고 농구부 창설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들이 한 학년씩 올라가는 2017년 군산고의 시대가 올 것으로 보였으나... 2017년 [[경희대학교]] 코치로 다시 자리를 옮겨 2018년까지 재직했다. 2022년 4월부터 [[충주고]] 코치로 재직하고 있다. == 여담 == 이창수하면 가장 기억남는 장면은 역시 [[1994-95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 8강전 삼성전자와 연세대의 대결일 것이다. 정규리그 13전 전승으로 올라온 연세대가 8위 삼성전자[* 예선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산업은행에 석연치 않은 패배를 당하면서 마지막 날 7위에서 8위로 떨어졌다. 예선전에서 대패를 당했던 2위 고려대를 피하기 위함이란 설이 파다했다.]를 무난히 꺾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여기서 이창수-[[박상관]] 콤비의 투혼(정말 문자 그대로 싸울 鬪였던)으로 연세대를 2승 1패로 꺾는 업셋을 달성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당시 농구팬이라면 모두 기억할 만한 [[서장훈]]에 대한 두 콤비의 집단 린치수준의 수비는 아직까지도 비판받고 있다. [[서장훈]]에게 피니시 엘보어택을 시전한 건 [[박상관|상관타]]였지만, 그전까지 골밑슛 막으면서 얼굴을 내리찍고 배로 주먹이 나가고 하면서 [[서장훈]], [[구본근(농구)|구본근]]을 더 많이 괴롭힌 건 이창수였다. 물론, 이 경기를 포함한 이 대회 자체가 이창수에게는 팀 선배인 [[김현준(농구)|김현준]]의 은퇴 대회이니 만큼 여기저기서 우승해야만 한다고 압박을 무진장 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세계에서 선후배간의 군기란 군대 이상으로 악명이 높아서 이창수라고 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당시 대한민국 농구 선수 중 [[끝판왕]]급인 [[서장훈]]을 지나치게 일찍 만났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창수는 선택의 여지 없이 저런 짓을 해야만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던 것이다. 이창수도 '''하고 싶어서 저지른 짓이 절대로 아니다...라며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경희대 시절 이창수는 성격이 너무 유순해 전쟁터와 같은 골밑을 지키기 위한 투쟁심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에 [[최부영]] 감독은 이창수의 투쟁심을 키워주고자 체대생 몇 명을 섭외, 훈련을 마치고 가는 이창수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고 싸우도록 했는데, 이창수가 그걸 그냥 맞고만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훈련의 효과가 있었는지, 삼성전자 입단 후부터 상당히 터프해졌다. [[서장훈]]을 그렇게 두드려팰 정도로.~~ 2019년 기준으로 아들인 [[이원석(농구선수)|이원석]]이 [[경복고등학교]] 3학년이며, 아버지를 따라 청소년 농구 국가대표로 뛰었다. 2019년 측정 기준으로 205cm. 운동능력과 스피드가 빅맨답지 않게 빠르고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골밑 플레이어로서 스킬을 연마받아 상당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6월 10일자 [[KBS joy]] 예능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출연해 서장훈에게 [[https://youtu.be/e4aBMjCc1VU|조언을 들었다]].[* 여담으로, 이창수는 아직도 서장훈에게 미안한 마음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인터뷰에서도 서장훈 얘기가 나오자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며 이 일로 장훈이가 또 언급되지 않았으면 한다며 언급조차 꺼리는 정도. 그리고 이창수 본인의 성격 자체도 선술한 대로 상당히 유순하고 그 성격에 후배에게 과한 수비를 벌이기도 했으니 미안함이 아직 있는 모양. 그래서 아들인 이원석도 촬영 내내 서장훈을 어려워하더니 이창수의 아들임이 밝혀지자 어쩔 줄 몰라하며 상당히 쭈뼛거렸다. 그와 별개로 서장훈은 이원석의 아버지가 이창수라는 말을 듣고 "아~ '''창수 형''' 아들이야?"라며 상당히 반가워했다. 이수근이 이원석에게 "아버지 이창수에게 서장훈이란?"이라는 질문을 하자 이원석이 "농구 잘 하던 선수였고 방송도 잘 하고 있더라"라고 대답했다.] 이원석은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농구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입학동기로 신가준(광주고,190cm), 유기상(용산고,190cm), 양준석(무룡고,182cm), 정이삭(낙생고,190cm), 김건우(동아고,200cm)가 있다.] 입학 후 U-리그에 출전 중이며 키가 2cm 더 자라 현재 207cm이다. 결국 대학무대에서 맹활약을 이어가던 2021년 2학년 신분으로 [[2021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KBL 드래프트]]에 지원했으며, 이창수의 친정팀이었던 서울 삼성 썬더스에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되면서 자신에 이어서 아들도 삼성에서 프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부자가 같은 프로팀에서 데뷔한 것은 KBL 출범이후 최초이다.] == 관련 문서 == * [[농구 관련 인물(한국)]] * [[서울 삼성 썬더스/선수단]] *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선수단]] * [[창원 LG 세이커스/선수단]] [[분류:동명이인]][[분류: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분류:1969년 출생]][[분류:1992년 데뷔]][[분류:2011년 은퇴]][[분류:센터(농구)]][[분류:서울 삼성 썬더스/은퇴, 이적]][[분류: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은퇴, 이적]][[분류:창원 LG 세이커스/은퇴, 이적]][[분류:군산제일중학교 출신]][[분류:군산고등학교 출신]][[분류:경희대학교 출신]][[분류:상무 농구단/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