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화민국의 대외 전쟁 · 분쟁)] [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3> {{{+1 '''이저사변[br]伊寧事變'''[br]'''Илийское восстание'''}}} || || '''기간''' ||<-2> [[1944년]] [[11월 7일]] ~ [[1949년]] [[12월 22일]] || || '''장소''' ||<-2> [[위구르|신강성 북부]] 일부 || || '''교전 세력''' ||[[파일:소련 국기.svg|width=23]] '''[[소련]]''' [[파일: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국기.svg|width=23]]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중화민국 국민정부|중화민국]]''' || || '''지휘관''' ||[[파일:소련 국기.svg|width=23]] [[이오시프 스탈린]][br][[파일: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국기.svg|width=23]] [[알리한 투라]] ||<^|1>[[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장제스]][br][[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장즈중[br][[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바이충시]][br][[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마부팡]][br][[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율리바스 칸[br][[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마수드 사브리 || || '''결과''' ||<-2> '''중화민국의 패배, 동튀르키스탄의 일시적 독립''' || || '''영향''' ||<-2> '''[[중국|중공]]의 위구르 장악''' || [목차] [clearfix] == 개요 == 1944년부터 1949년까지 국민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위구르인의 반란이다. == 배경 == === 성스차이 정권의 붕괴 === 신강성을 지배하고 있던 [[성스차이]]는 당시 군벌들과는 달리 공산주의 군벌로 소련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를 통해 [[신강 침공]]을 막아내고 1937년에는 [[마중잉]]의 신강 남부(퉁가니스탄)를 정복하여 다시 신강 전체를 지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성스차이는 공산주의 이념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전에 신강을 지배했던 군벌들처럼 위구르인들을 착취하는데만 전념했다. 그러나 성스차이는 지속적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와도 연락하며 박쥐처럼 행동했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이런 놈을 더 이상 지원해바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실각시킨다. 성스차이가 국민정부에 의해 충칭으로 소환되고 국민정부의 직접통치로 변하였다. === 중화민국의 수탈 ===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지배 또한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국민정부는 위구르인들의 자치권을 무시했고 결국 실무자들은 군벌들이었기에 세금외에도 자체적으로 징수하는 잡세가 너무 많았다. 더구나 중일전쟁의 풍파를 피해갔던 성스차이 정권과 달리 중일전쟁의 재정적 부담을 신강성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재산을 착취하기만 했던 성스차이와 달리 국민정부는 위구르의 문화를 말살하며 위구르의 역사마저 왜곡하며 지금 중국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위구르인들은 점차 국민정부를 타도하고 신강에 위구르인의 독립정부를 새워야한다는 관념이 계속해서 싹트기 시작했다. == 진행 == === 쿨자 반란 === 쿨자 지역은 신강 지역 중에서도 소련 측과 직접적인 교류가 오고가던 지역이었다. 많은 튀르크인들이 소련에 건너와 살았고 대숙청을 피해 도망친 러시아인들도 상당수 쿨자에 거주하고 있었다. 당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쿨자의 지식인들도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주의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국민당의 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1943년 이들은 훗날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전신이 되는 신강 튀르크 해방 인민 해방 위원회, 약칭 STPNLC를 수립한다. STPNLC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조직들 중 하나였고 1944년 마침내 스탈린은 신강에 봉기를 일으켜 주 정부를 탈취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소식을 들은 국민정부는 진압군을 우루무치로 파견하였으나 이미 소련의 지원군이 도착한 상태에서 중일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부군이 쿨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위구르인들과 백계 러시아인들은 국부군에 격렬히 저항했다.[* 신강 침공때도 그랬지만 신강에 살던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련 정부보다도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부패한 국민정부를 더욱 싫어하였다. 그렇기에 소련의 침공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반군도 완전히 명분에서 앞서는 것은 아니었다. 반군은 점령지의 한족 거주민들을 [[제노사이드|무차별 학살하였다.]] 특히 국민정부와 [[성스차이]] 정권에 부역한 이들이 주요 타겟이 되었다. 이들은 비밀경찰을 창설하였고 중국어 교육을 금지했다. 이에 튀르크 정체성도 한족 정체성도 미약하던 이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퉁구스계[* [[거란]]] 민족인 시베족 반군을 도운 한편 후이족계의 퉁간인들은 중립을 지켰다.[* 마씨 일족을 포함한 후이족들은 서북 지역의 튀르크인 탄압에 앞장섰지만 퉁간인들은 문화적으로 후이족 주류에 비해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테러의 타겟이 되지 않았다.] === 일리 국민군의 결성 === 키르기스 출신의 이샤크 벡과 백계 러시아인인 폴리노프, 레스킨 3인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4월 3일 일리 국민군을 창설하였다. 이들은 모두 친소파로 소련에서 군복무를 한 적이 있었다. 일리 국민군 역시 키릴문자로 동튀르키스탄 공화국군이라는 뜻으로 ВТР(Восточная Туркестанская Республика)라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소련은 중국이 위구르를 장악하면서 이에 대해 침묵했으나 [[반수정투쟁]]과 [[중소국경분쟁]]으로 사이가 멀어지자 이를 공식 인정한다. 일리 국민군은 우루무치를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으나 마부팡의 청해군벌은 이들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칭하이성에서 군대가 우루무치로 파견되면서 소련군, 일리군과의 전면적인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다. 초반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카슈가르와 이슈칸드를 점령하며 승기를 잡았으나 곧 국부군에 의해 밀리게 된다. 우루무치를 두고 반군과 국부군이 공방전을 벌인 채 진전이 없자 결국 양측은 1946년 휴전한다. === 휴전 기간의 소요 === === 바이드 복드 전투 === == 결과 == === 예상치 못한 상황 === === 중공으로의 편입 === [[분류:1940년대 사건사고]][[분류:중가리아의 역사]][[분류:국민정부의 역사]][[분류: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분류: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