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제63대 법무부 차관,rd1=이용구(법조인))] [include(틀:조선귀족)] ---- ||<-2> {{{#b0313f,#b0313f '''[[일진회|{{{#b0313f 일진회 회장}}}]][br]{{{+1 이용구}}}[br]李容九 | Lee Yong-gu'''}}}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31627_176509_2102.jpg|width=100%]]}}} || || '''성명''' ||이용구(李容九) || || '''초명''' ||이우필(李愚弼) || || '''이명''' ||이만식(李萬植)·이성순(李聖順)[br]이상옥(李祥玉, 李相玉, 李尙玉) || || '''자 / 호''' ||대유(大有) / 해산(海山) || || '''본관''' ||[[벽진 이씨]][* 32세 우(愚) 항렬.][[http://www.e-donghak.or.kr/sa/listDetSa.jsp?pLevel=4&pDatabaseID=prd_0163r&pRecordID=prd_0163r_004_001|#]] || ||<|2> '''출생''' ||[[1868년]]([[고종(대한제국)|고종]] 5) [[2월 14일]] || ||[[경상도]] [[상주시|상주목]] 외동면 진두리[br](현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진두마을) || ||<|2> '''사망''' ||[[1912년]] [[5월 22일]] (향년 44세) || ||[[일본]]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 || || '''직업''' ||[[종교인]], 정치가 || || '''종교''' ||--[[천도교]](동학)-- → [[시천교]] || || '''도호''' ||지암(智菴)[* [[동학]]교도로서의 도호], 봉암(鳳菴)[* [[시천교]] 교주로서의 도호]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진회|우리]]는 참 [[매국|바보짓]]을 했어요.[br]혹시 [[1904년|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 >---- >사망 직전의 유언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인]], [[종교인]]. [[일제강점기]] 직전 [[일진회]] 회장을 지냈던 [[친일파]]로 1910년 [[한일병합]] 때 [[이완용]] 등과 함께 한일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후 [[일본 제국|일제]]에게 [[토사구팽]]당하고 [[귀족]] 작위도 거절하는 등 허탈해하다 1912년 [[사망]]했다. 본관은 [[벽진 이씨|벽진]](碧珍).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 동학교도로서 도호는 지암(智菴)이고 [[시천교]] 교주로서 도호는 봉암(鳳菴)이다. 초명은 이우필(李愚弼)인데 이후 이상옥(李祥玉, 李相玉, 李尙玉)·이만식(李萬植)·이성순(李聖順) 등의 이름을 사용한 바 있다. 이용구라는 [[이름]]은 [[동학]]의 제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하사]]한 이름으로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의 9개 구절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이용구가 동학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95B4B3E5A683EBE14.jpg|width=100%]]}}} || 1868년 2월 14일 [[경상도]] [[상주시|상주목]] 외동면 진두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진두마을)에서 이일화(李一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농사]]를 짓다가 1890년 [[동학]]에 입교(入敎)하여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의 교육을 받았으며 투철한 [[신앙]]으로 [[손병희]]와 함께 최시형의 고제(高弟, 뛰어난 학식과 품행을 지닌 [[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 농민군으로 참전하였으며 손병희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03년 [[귀국]]하여 동학 포교(布敎) 운동을 벌였다. 외세의 침탈과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국내에서는 [[아시아]]가 뭉쳐 서구 열강을 몰아내자는 취지의 [[아시아주의]]가 큰 지지를 받게 된다. 동학의 제3대 교주인 손병희는 봉건적인 [[대한제국]]을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는 방안으로 아시아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로 한다. 손병희는 아시아주의를 바탕으로 동학을 근본으로 한 [[국가]]의 개조를 꿈꾸었으며 이 때부터 여러 민회를 만들고 일본과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하지만 이용구는 아시아주의에서 더 나아가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자는 '대동합방론'[* 이 사상은 차후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한다.]에 심취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명분으로 아시아가 뭉쳐 대동국을 이루고 일본과 [[한국]]이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개소리]]를 선전하였고 이용구는 어리석게도 이를 철석같이 믿게 된다. 이용구가 바라던 한일 합방의 모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대한제국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하여 열강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일본의 '대동합방론'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목적하에 일본 [[우익]]에서 만들어낸 사상으로 이용구가 원했던 합방과 정반대의 입장이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ile.newdaily.co.kr/1259040128.jpg|width=100%]]}}} || || 오른쪽이 이용구. 왼쪽은 [[송병준]]. || 이용구는 1904년경 '대동회'를 결성하는데 이후 대동회는 '진보회'로 명칭을 바꾸고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한다. 이 때부터 이용구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진회를 만들고 일진회 회장이 된 뒤 일본의 우익 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겐요샤|현양사]](玄洋社)의 도움으로 친일 행위에 나서게 된다. 이용구는 [[백성]]들에게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고 친일 행위를 찬양하며 한일병합을 제창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까지 한일병합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용구의 친일 행동은 국내에서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에 1905년 손병희는 노골적인 친일 행동을 일삼는 이용구와 62명의 동학 [[지도자]]를 동학에서 축출함과 동시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다. 이용구는 출교 처분을 당한 후 동학 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친일 성향의 신흥 [[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이용구와 일진회는 친일에 대한 보상으로 몇몇 간부가 관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모든 [[국민]]들의 [[역적]] 1순위가 되었는데 각종 [[의병]]의 타도 대상이 되었으며 수많은 [[테러]]에 시달렸다. 송병준을 싫어했던 [[이완용]]은 송병준과 하나가 된 일진회를 고깝게 보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게 되었기 때문에 일진회는 어느 곳에도 발 붙일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며 [[조직]]은 와해될 [[위기]]에 놓인다. 더이상 한국에서는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이용구는 조직을 [[만주]]로 옮기고 만주를 개척하면서 살 계획을 세운다. 이에 이용구는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한일합방 청원을 앞장서 추진할테니 만주 이주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 엔을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 때 가쓰라 다로는 이용구에게 "합방에 힘써준다면 3백만 엔이 아니라 3천만 엔이라도 줄 수 있다."라고 [[약속]]한다. 이용구는 한일합방 전까지도 일본이 주장한 합방의 내용이 자신이 생각한 1:1 대등합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용구는 이후 대한제국과 일본이 맺은 [[한일병합조약]]의 병합을 문제삼으며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그의 [[장례식]] 당일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했다. 1910년 일본이 원하는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이용구는 바로 [[토사구팽]]당하는데 일진회가 1주일의 시한을 받게 되며 쉽게 말해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 일본은 1910년 9월 일진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해산비 명목으로 달랑 15만 엔을 던져주었는데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결국 이용구는 자신이 토사구팽당한 것을 깨닫고 귀족 작위도 거절한 체 허탈해하며 [[결핵]]에 몸져 눕게 되는데 1912년 죽기 직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친일|바보짓]]을 했어요. [[1904년|처음]]부터 [[사기|속았던 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911년 일본 스마(須磨) 지방[* 현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으로 건너가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12년 병고(病苦)로 죽었는데 죽은 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勳)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아들로는 [[이석규(1910)]]가 있다 > 이용구: [[자학|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사기|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 우치다 료헤이: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응 아니야|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정작 저 말을 전한 우치다 료헤이야말로 일진회의 고문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였으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음지에서 추진하던 대륙 [[낭인]]의 거두였다. 되도 않은 구라를 쳤을 확률이 높은 셈.] >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日本之亞細亞』''' 그나마 사망 직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면서 지금도 이용구의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표격으로 남아있다.[* 위 링크한 이석규 인터뷰 기사에서 조갑제 전 조선일보 기자가 단언하듯 이용구에 대한 동정은 오직 [[문학]]적인 문제일 뿐이다. 아무리 실수라도 [[매국노]]라는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 [[분류:1868년 출생]][[분류:1912년 사망]][[분류:결핵으로 죽은 인물]][[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벽진 이씨]][[분류:사이비 종교의 교주]][[분류:일제강점기의 종교인]][[분류:조선귀족 작위 거부자]][[분류:일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