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 의병장]][[분류:형조판서]][[분류:경주 이씨]][[분류:1569년 출생]][[분류:1626년 사망]] 李時發 [[1569년]] ~ [[1626년]] (향년 57세)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 호는 벽오(碧梧). == 생애 == [[김종직]]의 [[시호]] 문제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으로써 [[사림파]]의 추앙을 받은 이원(李黿)의 4대손이다. 20세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인]](西人)[* 1594년(선조 27) [[정철]](鄭澈)의 탄핵을 반대하는 등 서인에 속했고, 이경휘, 이경억 등 그 후손들도 대체로 서인에 속했다.]에 속하였고 중국어 및 군사·행정 실무에 능한 유능한 관료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조좌랑·정랑[* 좌랑(佐郞)은 6조의 정6품 관직, 정랑(正郞)은 6조의 정5품 관직이다. 좌랑은 상급자인 정랑과 한 조가 되어 행정실무를 총괄했는데, 6조의 권한이 강화되고 국정의 중심기구가 된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청요직(淸要職)이었다. 특히 이조·예조·병조의 정랑·좌랑은 중시되어 문과 출신의 문관으로만 임명하였다. 각 조의 정랑·좌랑을 아울러 낭관(郎官)·낭청(郎廳) 또는 조랑(曹郎)이라고도 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좌랑은 인사행정을 담당했기 때문에 전랑(銓郎)이라고 하였다.] 등을 역임하면서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도체찰사]] [[류성룡]](柳成龍)을 보좌하였고, 1593년(선조 26)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통역을 맡아 그의 군대를 안내하였다. 낙상지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명나라의 병법을 배웠고, 그의 재주에 감탄한 낙상지는 본국에 귀국하면서 [[선조(조선)|선조]](宣祖)에게 중용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596년(선조 29)에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했다. 1601년(선조 34) [[선조(조선)|선조]]의 두터운 신임하에 4년간 3차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1604년(선조 37)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며 6진(鎭)의 번호(藩胡)[* 6진 주변에 살던 오랑캐.]를 진정시켰다. 1608년(광해 즉위년) 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북방의 방비를 맡았다.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였다. 1623년(인조 1)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를 지냈고, 1624년(인조 2) 부체찰사(副體察使)가 되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청나라|후금]](後金) 세력이 강성해지자 강화도의 군비 시설을 강화하였고 뒤이어 [[남한산성]] 수축을 감독하던 중 사망하였다. 군사관계 서적인 주변록(籌邊錄)을 저술하였으나 실전되었다. 사후 80여 년 뒤인 1708년(숙종 34)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자손들도 고관을 지냈는데, 차남 이경휘(李慶徽, 1617~1669)는 [[이조판서]]를 지냈고, 3남 이경억(李慶億, 1620~1673)은 문과에 [[장원|장원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및 이조·호조·예조·형조 등 각조 [[판서]]를 두루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 그 외 == 중국어와 군사, 행정 실무에 모두 능한 유능한 관료로 항상 난리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으나 국사책에 실리지 못한 이유는 역시 이름 때문이라는건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고, 대중서도 아니고 교과서에 그런 이유로 이름이 실리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당장 [[고자(전국시대)|이분]]만 봐도...] 국사책은 다뤄야 할 시대는 많고 분량은 한정되어 있어서 시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개개인의 이름을 일일이 실어주지 않는다. 여러모로 [[왕자지]], [[김자지]]와 [[별난 이름|같은 케이스]]라 보면 된다. 호가 벽오라 이벽오라 칭할 수 있으니 등재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생전에 자나 호가 이름 이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잠은 자를 따라서 '도연명'으로, 제갈량도 자를 따라서 '제갈공명'으로, 소옹은 시호를 따라서 '소강절'로 부르는 예가 많다.] 대개 이름을 표기하는 쪽이 원칙이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보면 젊은 시절에 김구가 이시발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구절로 보아 백 년 전까지는 그 이름이 욕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요즘은 씨발 정도로 발음 하지만 오리지날은 씹팔, 씨팔 정도로 앞뒤 단어에 거센소리가 있다.][* 씨발은 원래 현대에 나온 말로 과거에는 '씹할'이라고 했다.] 미디어에서는 《[[녹두전]]》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다. 웹툰 《[[조선왕조실톡]]》[[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42598&no=257&weekday=wed|250화 '웃긴 이름 대잔치']]에도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