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석}}}'''[br]'''李錫'''}}}}}}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석(칠곡 독립운동가).png|width=100%]]}}} || ||<-2> 1930년 12월 17일 촬영된 사진. || || '''이명''' ||이이석(李李錫) || ||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2세 '''석(錫)''' 진(鎭) 항렬.] [[http://chilgok.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ilgok&dataType=99&contents_id=GC02301926|#]] || ||<|2> '''출생''' ||[[1910년]][* [[http://db.history.go.kr/id/ia_3885_3011|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2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2월 9일]] ||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br](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이두석(1912년 5월)|이두석]]·[[이수각(1887)|이수각]]·[[이수목(1890)|이수목]]도 이 마을 출신이다.] || ||<|2> '''사망''' ||[[1978년]] [[12월 5일]] (향년 67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89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석은 1910년 12월 9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현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아버지 이수헌(李壽獻)과 어머니 [[순천 박씨]][* 박희동(朴熙東)의 딸이다.]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화동(종로구)|화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에 거주하였다.[*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지금의 화동 2번지, [[서울특별시교육청정독도서관]] 자리에 있었으며, 1976년 2월 20일 현재 위치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강남구)|삼성동]]으로 이전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그는 결사대에 가담, '식민지교육 타파'를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후 1929년 11월에는 [[경성부]]에서 정종근(鄭鍾根)·권유근(權遺根) 등과 함께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자, '검속된 조선 학생을 탈환하고 식민지 교육에 반대한다'는 격문을 제작·배포하였고, 이를 통해 일제 식민교육의 부당성을 꾸짖으며 한편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격문 배포로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월 29일부터 수감되었으며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1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675&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귀향하여 고향 칠곡군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에는 최소복(崔小福)·[[정칠성]] 등과 함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조선 독립 및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편으로 왜관면에서 [[이두석(1912년 5월)|이두석]]·[[박형동]]·윤억병(尹億炳) 등과 함께 독서회라는 이름으로 비밀결사 성진회(惺進會)를 만들고, 회원 70여 명과 더불어 농촌계몽과 민족 사상을 고취시켰다.[[http://chilgok.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ilgok&dataType=99&contents_id=GC02301926|#]] 그러나 [[대구광역시|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남산동)에 거주하던 중 1938년 2월경 체포되었으며, 4년간 취조를 받고[* 1940년에는 6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에서 구류갱신결정 판결이 내려졌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listkeywordSearch.do?page=1&listSize=10&flag=3&actionFlag=det&keyword=%ec%9d%b4%ec%9d%b4%ec%84%9d&reKeyword=&owner=&organ=&sdate=19040101&edate=19451231&oldAddress=&momentDates=&sort=0&names=&crime=&depth11=&depth12=&ivl_cases=&retIvlRegion=&search_region=|#]]] 1941년 3월 7일이 되어서야 대구지검의 예심에서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02&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0970&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공판에 회부되었다]]. 그 뒤 1여년 후인 1942년 2월 23일 비로소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통산 840일)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4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67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8년 12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8년 6월 2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광주 이씨]][[분류:1910년 출생]][[분류:197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