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군 훈련대 간부)] ||<-2> {{{#292929 '''{{{+1 이두황}}}[br]李斗璜|Lee Du-hwang'''}}}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46604096.jpg|width=100%]]}}} || || '''이름''' ||이두황(李斗璜) || || '''자''' ||공칠(公七)·설악(雪嶽) || || '''본관''' ||[[인천 이씨]][* 공도공파 28세 황(璜) 항렬.] || ||<|2> '''출생''' ||[[1858년]] [[1월 11일]] || ||[[한성부]][br](현 [[서울특별시]]) || || '''사망''' ||[[1916년]] [[3월 9일]] (58세) || || '''직업''' ||관료, 군인 ||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목차] [clearfix] == 개요 == [[을미사변]]의 주동자 중 하나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 [[대한제국]]의 무신으로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 행적 == 1858년 1월 11일 [[한성부]]의 빈한한 집안에서 아버지 이명흡(李命洽)[* 족보명 이완필(李完必).]과 어머니 [[조(성씨)|조씨]]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이준황(李俊璜), 아래로 남동생 이문황(李文璜)[* 이명 이태황(李台璜).]이 있었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3월 [[홍계훈]]의 소속으로 장위영(將衛營) 대관으로서 진압에 참여하였으며 이후에는 [[김홍집]] 친일 내각에도 참여했다. 또한 [[청일전쟁]]에서는 일본군 소속에서 청군의 시체 처리를 담당했고[* 이때 청군에서는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의 조선군이 이두황의 장위영 군대와 싸웠다.] 평양 산하의 형세를 살피거나 적정을 염탐하였다. 그 해 10월 2차 동학농민전쟁 때 있었던 [[우금치 전투]]에서는 양호도순무영우선봉장(兩湖都巡撫營右先鋒將)의 직책으로 농민군을 대다수 살육하였다.[* 여기서 [[이규태(의병장)|이규태]]와 [[이진호(1867)|이진호]]도 같이 참전했다. 이진호는 일본군이 훈련시킨 교도중대 350명을 이끌었다.] 또한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이 장흥으로 도망치자, 농민군 지휘부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했다. 1895년 4월 양주목사로 전임되었다가 6월 육군 참령, 7월 훈련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 승진했으나 10월 7일 친일성향의 훈련대 해산을 통고받았다. 그 이후 [[조선군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서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여기서 [[홍계훈]]이 이두황을 질책하였으나, 일본군이 그를 사살했다고 한다. 이후 금강산을 거쳐 부산으로 간 뒤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머리를 깎고, 이토 시치로(伊藤七郞)[* 이토 히로부미의 일곱번째 아들이라는 의미이다.]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서 동료였던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게 살해당했으나, 이두황은 끝까지 살아남아 [[1907년]] [[순종(대한제국)|순종]] 즉위 때 귀국하였고, [[명성황후|민비]] 시해에 대해 사면받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았으며,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정미의병]]을 제압하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주도하는 등 죽을 때까지 친일 행적을 굉장히 많이 저질렀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하여 전북도장관을 지내다가 1916년 신장염 악화로 인해 58세의 나이로 죽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문을 왔다. 그의 유해는 [[전라북도]] [[전주시|전주군]] 이동면 노송리(현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김윤식이 짓고 정병조가 이를 썼다. == 여담 == *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공무원이었던 [[차일혁]][* 차일혁의 할아버지가 동학군의 지주인 차치구였다. 이두황은 동학군 살육 때 차치주를 즉결처형했던 전적이 있었다.]이 1951년에 이두황을 부관참시하고자 그의 묘를 파헤쳤으나, 일본식으로 화장해 뼛가루가 든 항아리만 있었기에 뼛가루를 내던져버리고 항아리는 깨부쉈다고 한다. * 일본 망명 생활 도중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도 자기 [[명성황후|국모]]를 시해해 놓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로 다른 망명객들과 함께 영웅인 것 마냥 활개를 치고 다녔다고 한다. * <양호우선봉일기>[* 1894년부터 1895년 당시 제2차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를 기록했다. * 이두황 무덤[* 전주시 기린봉에 그의 무덤이 있다.]에는 그를 욕하는 문서들이 나돌고 있다. 기린봉 입구에는 단죄비가 세워져 있다.[* 시민단체가 2016년 세운 것이다. 파묘된 무덤이 재발견 된건 2013년인데 이걸 밝힌 사람은 다름아닌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이다.] *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 되길 간청했다. [각주] [[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온건개화파]][[분류:조선의 군인]][[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인천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858년 출생]][[분류:191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