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李根命, 1840~1916 조선 말의 문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순구(舜九)이며, 호는 동미(東眉)이다. 이흥민의 아들이었으나, 이시민에게 입양되었다. == 생애 == 1871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 생활을 하였고 1886년에는 이조참판, 1898년에는 내부대신이 되었다. 1895년 춘천부관찰사가 되고 이 해부터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896년에는 평안남도 관찰사가 되어 평안남도 판사를 겸임하였다. 1898년 비서원경·내부대신으로 발령 받았고, 의정부찬정을 겸하였으며, 이 해부터 여러 차례 태의원경을 역임하였다. 1899년에는 중추원의관·시종원경·장례원경·홍문관학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일본군에게 구금되었으며, 그 해에 4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1등 태극장을 받았다. 그 이후로는 일제에 순응하여 국권 피탈에 협력하게 된다.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사회 발기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민영규와 함께 국기를 들고 앞길을 인도하여 숙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고, 규장각 지후관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대훈이화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대한산림협회의 명예회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3월에는 친일단체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에 동조하는 협성회를 발기하고 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조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13일에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에는 경성협찬회에 기부금을 내고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6월 사망했고 같은 해 9월 손자 이충세(李忠世)가 그 작위를 습작한다. [[분류:조선의 문관]][[분류:1840년 출생]][[분류:191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