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목차] == 개요 == 고려의 화공.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로, 궁중 화가 [[이녕(고려)|이녕]](李寧)의 아들이다. == 생애 == 이광필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그림으로 [[명종(고려)|명종]]에게 총애를 받았다. 명종이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을 부(賦)로 표현하라고 한 뒤 이광필에게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게 한 일이 있다. [[무신정권]]에 의해 왕위에 오른 명종은 국정 운영보다는 취미인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고, 화공인 이광필과 고유방(高惟訪)은 그런 왕과 어울렸다. 특히 [[산수화]]를 많이 그리러 다녔는데, 명종은 궁궐 밖에서 종일을 보냈기 때문에 중요한 업무라도 간소하게 처리되고는 했다. 무신 [[두경승]]이 삼한후벽상공신의 지위에 오르자 화공 이광필이 공신각 벽에 두경승의 초상화를 그리게 됐다. 이광필은 화법(畵法)에 따라 살아 있는 사람인 두경승의 전신이 아닌 반신만을 그리려고 했는데, 두경승은 이광필에게 화를 내며 전신을 모두 갖춰 그리도록 했다. 그런 두경승은 수개월 뒤 명종이 쫓겨나고 [[최충헌]]이 집권하게 되면서 변방으로 유배됐다. 역시 공신각에 있던 무신 [[이의민]]의 초상화가 최충헌에 의해 지워진 것[* 최충헌은 왕에게 이의민의 초상을 없앨 것을 요청했고, 조서가 내려져 그 초상은 흙으로 덧칠해져 지워졌다. (『고려사』 권128, 반역 열전.)]을 보면, 두경승의 초상화가 멀쩡히 남아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 평가 == >微光弼, 三韓圖畵殆絶矣. >이광필이 없었더라면 [[삼한#s-3]] 그림의 명맥이 거의 단절됐을 것이다. >---- >『고려사』 권100, 이녕 열전. 명종이 정언 [[최기후]]에게 한 말. == 가족관계 == 이광필의 아들은 [[묘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다고 해서 1140년대 중반에 20세의 나이로 대정(隊正)에 임명됐다. 정언 [[최기후]]는 묘청의 난 진압 때 10세에 불과했던 아이가 어떻게 정벌군으로 종군할 수 있었겠느냐며 임명장에 서명을 거부했는데, 왕은 "너는 이광필이 우리나라를 빛낸 것도 모르느냐"며 이광필을 칭찬한 끝에 최기후를 설득했다. 평가 문단의 이광필에 대한 명종의 칭찬은 이 때 나온 것이다. [[분류:고려의 화가]][[분류:전주 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