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태종의 황자[br]{{{+1 오왕 | 吳王}}}'''}}} || ||<|2> '''출생''' ||[[619년]]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시안구) || ||<|2> '''사망''' ||[[653년]] [[3월 10일]] (향년 34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장안궁[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시안구) || || '''능묘''' ||미상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각(恪) || || '''부모''' ||부황 [[태종(당)|태종]][br]모후 양비 || || '''형제자매''' ||14남 21녀 중 3남 || || '''배우자''' ||홍농 양씨, 난릉 소씨 || || '''자녀''' ||4남 5녀 || || '''작호''' ||오왕(吳王) || || '''시호''' ||없음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황족. [[태종(당)|태종]]의 3남이다. 이름은 이각(李恪)이며 생전 작위는 오왕(吳王). == 생애 == 이각의 모친은 [[양제(수)|양제]]의 딸이었다. 즉 이각은 양제의 외손자인셈. 처음 작위는 장사군왕, 한중군왕이였고 628년 촉왕에 진봉되었다. 그 후 636년 작위가 오왕으로 개칭되었으며 안주(安州)도독이 되었다. 이후 643년 태자 이승건이 폐위되고 둘째인 이태도 문제가 많자 태종은 총애하던 이각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장손무기]]가 반대하여 이각은 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결국 [[고종(당)|진왕 이치]]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653년 [[고종(당)|고종]]이 재상 [[방현령]]의 아들 방유애(房遗愛)가 반역을 계획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심문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장손무기]]는 이각도 같이 반역을 계획했다는 거짓 보고를 했고,[* 장손무기와 이각은 사이가 안 좋았다.] 이각은 사사를 명받아 처형당한다. 이각은 죽기 전 장손무기에게 저주를 퍼부었는데, >如果社稷有靈 長孫無忌將遭族滅! >사직에 영이 있다면 장손무기는 바야흐로 겨레가 멸해질 것이다! 과연 659년 장손무기는 [[측천무후]]에 의해 반란죄로 모함받는 처지가 되었고 [[허경종]]이 자살을 강요하여 목을 매달고 자살하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장손무기의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하남장손씨는 노예로 강등당했다. 이각이 죽은 지 300년이 지난 후, [[오대십국시대]] [[남당]]을 세운 [[이변(남당)|이변]]이 이각의 후손을 자처했다고 하나 [[구오대사]]에는 이변이 [[이각(건왕)|건왕]](建王)[* [[헌종(당)|헌종]]의 8남. 건왕의 이름도 이각(李恪)이다.]의 후손을 자처했다고 전해진다. 남당의 마지막 황제 [[이욱]]의 동생 이종겸(李從謙)의 묘비명에 따르면 건왕의 후손을 자처했다고 전해지기에 건왕의 후손을 자처한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 사극에서의 등장 == 측천무후를 다룬 드라마 [[무미랑전기]]에서 등장하였다. 무미랑전기에서의 이각은 [[오왕(무미랑전기)]] 항목 참조할 것.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수당시대/황족]][[분류:619년 출생]] [[분류:653년 사망]] [[분류:독살형된 인물]][[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