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음성국}}}'''[br]'''陰聖國'''}}}}}}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음성국.jpg|width=100%]]}}} || ||<|2> '''출생''' ||[[1891년]] [[3월 6일]] ||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경릉리[* 구한 말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경릉리 → 1914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 1946년 황해도 장풍군 영남면 경릉리 → 1952년 황해도 장풍군 서암리.][br](現 [[개성시]] [[장풍군]] 대덕산리) || ||<|2> '''사망''' ||[[1935년]] [[7월 19일]] || ||[[만주국]] [[봉천성]] [[푸순시|무순현]] 무순감옥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1년 3월 6일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경릉리(現 개성시 장풍군 대덕산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흥경현(興京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에 거주했다. 일찍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1920년 [[유돈상]] 등과 함께 봉천성 동변도 [[지안시(지린성)|집안현]](輯安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지린성)|지안시]].]에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고 서기(書記)를 맡았다. 이후 대위사하(大葦沙河) 이도외자(二道崴子)[*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 얼다오웨이쯔(二道崴子).]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6월 19일 중국 관헌에 [[http://db.history.go.kr/id/kd_042_0010_5460|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진 것은 나라를 위한 진정성 있는 교육이 없기 때문이라며 인재 양성이 참으로 급하다고 여겨 유돈상·음성진(陰聖進) 등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뒤 국민부(國民府)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이와 연계하여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2년 국민부의 영릉(永陵)[*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융링진(永陵鎭).] 지역 총관(總管)을 맡아 국민부 지방조직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조선혁명군의 [[양세봉]] 총사령이 순국한 후에는 박대호(朴大浩) 등과 함께 붕괴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의 재건에도 힘썼다. 그는 겉으로는 영릉가(永陵街) 지역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187|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을 역임하면서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고, 비밀리에 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은 곧 일본 밀정에 의해 발각되었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일본영사관을 거쳐 봉천성 [[푸순시|무순현]] 무순감옥에 수감되었고 1935년 7월 19일 이곳에서 피살되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장단군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3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희귀성씨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