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尹誧 (1063 ~ 1154) == 개요 == 고려의 문신. 개명하기 전 이름은 윤해(尹諧), 시호는 열정(烈靖). 문학과 정사, 음율에 두루 통달해 여러 업적을 남긴다. == 생애 == 8세에 부친상을, 10세에 모친상을 당해 누이에게 의지하게 된다. 일찍이 국자좨주 [[김근(고려)|김근]]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문종(고려)|문종]] 36년(1082) 남궁시에 합격한다. 이어서 [[선종(고려)|선종]] 5년(1088) 상국 [[최사추]]와 [[최석(고려)|최석]]이 주관한 진사시에 급제하며 내시로 등용된다. 선종 7년(1090) 비서교서랑에 임명되고 [[숙종(고려)|숙종]]이 즉위한 뒤에는 직사관에 임명됐다가 권(權) 직한림원으로 옮긴다. 숙종 8년(1103) 전중내급사로서 [[영암군]]에 지방관으로 나가는데 지방을 다스림이 제일 뛰어났기에 부임지에서 조정에 포장(褒狀, 칭찬하는 문서)을 보고한다. [[예종(고려)|예종]] 2년에 시(試) 합문지후로 임명되고 예종 7년(1112) 호부원외랑으로서 광주목의 수령으로 발령돼 잠깐 개경을 떠난다. 이듬해 예부원외랑 지다방사로 임명돼 바로 개경으로 복귀했으며 여러 번 승진을 거듭해[* [[고려사]]에는 예종 11년(1116) 직보문각에 임명되고 청연각에 불려가 눈에 관한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이름은 개명 전인 윤해였다.] 예종 17년(1122)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 지제고에 이른다. [[인종(고려)|인종]]이 즉위한 뒤에는 『[[정관정요]]』에 주석을 단 일이 있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이 정권을 장악하고 [[척준경]]이 궁궐을 방화할 때 윤포는 왕을 지켰으며 그 공적이 대사(大史)에 실린다. 이자겸 등이 실각한 뒤인 인종 5년(1127) 남궁시의 시험관이 돼 진사와 명경 백여명을 선발하게 된다. 내시 대부소경 서순, 예빈소경 겸 어사잡단 한정 등이 이 과거에서 급제한다. 인종 10년(1132) 여름 나이가 70세에 이른 윤포는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로 은퇴하는데, 윤포의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종 11년(1133) 왕명을 받들어 [[사(문학)|고사]](古詞) 3백수를 가려서 모은 『당송악장』 한부를 바치고, 인종 24년(1146)에는 『태평광기촬요시일백수(大平廣記撮要詩一百首)』[* 직역하면 "[[태평광기]]에서 모은(撮) 중요한 시(要詩) 100수"이다.]를 편찬해 표와 함께 바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한다. 인종은 지주사 [[최유청]]을 윤포에게 보내 "경은 나이가 많은데도 총명함과 글 짓는 재주가 처음과 같으니 가상하고 잊을 수가 없도다."[* 卿年高, 聰明藻思如新, 嘉歎不忘.]라고 칭찬한다. 은퇴 후에도 여러 공을 세웠기에 이 해 12월에 검교태사 수사도 참지정사 주국에 오른다. 그 외에도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서역기]]』를 바탕으로 지도 「오천축국도(五天竺國圖)」를 지어 바쳤으며, 명을 받고 온 우승선 [[김존중]]과 함께 악보(樂譜)를 자문하기도 한다. 윤포는 말년에 항상 내전(內典, [[불경]])을 읽었는데 인종에게 『[[법화경]]』을 헌상하기도 한다. 의종 8년(1154) 7월 16일(음력) 92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열정공(烈靖公)의 시호가 추증되고 8월 3일 개경 동쪽 법운산(法雲山) 기슭에 장사된다. == 가족관계 == * 증조부: 윤수현 * 조부: 윤수기 * 부: 윤조명 * 모: 평산 유씨 * 누이 * '''본인: 윤포''' 윤포의 조상은 춘주(春州) 횡천현(橫川縣) 출신이다. 윤포는 고려 개국공신 윤신복의 6대손이고 또 [[태조(고려)|태조]]의 6대 외손이기도 하다. 증조부 윤수현은 공부상서로, 조부 윤수기는 우복야 호부상서 상장군으로, 부친 윤조명은 우복야 행형부낭중 겸 태자중사인으로 추증된다. 윤포의 외조부 검교태자첨사 유설(庾說)은 [[유금필]]의 후손이다. * '''본인: 윤포''' * 처: 왕씨 * 아들: 윤영준 * 아들: 경소 * 아들: 윤영수 * 아들: 윤영식 * 아들: 윤영원 부인 왕씨와 사이에서 5남 3녀를 뒀다. 셋째 아들 윤영수와 세 딸은 모두 일찍 죽는다. 윤영준과 윤영식은 과거에 급제했고 차남은 [[법명]]이 경소(警韶)로 출가해 중태사(重太師)가 된다. 막내 윤영원은 윤표묘지명이 지어진 시점(1154년)에 아직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 녹봉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묘지명의 찬자인 황문통(黃文通)은 이를 안타까워한다. [[분류:고려의 인물]][[분류:1063년 출생]][[분류:115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