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1964년생 정치인, rd1=윤택영(1964))] [include(틀:대한제국의 부원군)] ---- [include(틀:조선귀족)] ---- ||<-3>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후작'''}}}]] || ||<-3>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 | 순정효황후의 부친[br]{{{+1 해풍부원군 윤택영}}}[br]海豊府院君 尹澤榮 | Yoon Taek-young'''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윤택영.png|width=100%]][br]세종대학교 소장의 윤택영 초상}}} || ||<-2> '''[[봉호|{{{#gold 봉호}}}]]''' ||해풍부원군 (海豊府院君) || ||<-2> '''[[본관|{{{#gold 본관}}}]]''' ||[[해평 윤씨|해평]](海平)[* 24세손 'O영(榮)' 항렬로 나잇대에 비해 항렬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윤치호]]의 증손자 뻘, [[윤보선]] 대통령의 손자 뻘, 그리고 [[KBS]] [[윤인구]] 아나운서의 아들 뻘이며 동요 작곡가 [[윤극영]]과 [[태영건설]], [[SBS]] 설립자 [[윤세영]]과 형제 뻘이다.] || ||<-2> '''[[이름|{{{#gold 이름}}}]]''' ||택영(澤榮) || ||<-2> '''생부''' ||윤철구 || ||<-2> '''생모''' ||정경부인 [[홍씨]](洪氏) || ||<-2> '''부인''' ||경흥부부인 [[기계 유씨]](杞溪 俞氏) || ||<-2> '''자녀''' ||딸: [[순정효황후|순정효황후 윤증순]], 윤희섭[br]아들 : 윤홍섭[* 윤택영의 장남으로 [[윤택영|아버지]]와는 다르게 독립운동가이자 [include(틀:한국민주당)] 소속 정치인이다.], 윤의섭[* (1912년 3월 8일 ~ 1966년 2월 25일)][* 윤택영의 차남으로 아명은 윤송무 (尹松茂),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계동정이다. 윤택영 사후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습작했다.] || ||<-2> '''종교''' ||[[유교]] {{{-2 ([[성리학]])}}} || ||<-2> '''작위''' ||[[조선귀족]] [[후작]] || ||<-2> '''별칭''' ||'''[[채무]]왕 (債務王)'''[br]차금대왕 (借金大王) || ||<|2> '''생몰[br]기간''' || '''[[음력|{{{#gold 음력}}}]]''' ||[[1876년]] [[2월 22일]] ~ [[1935년]] [[9월 27일]] || || '''[[태양력|{{{#gold 양력}}}]]''' ||[[1876년]] [[3월 17일]] ~ [[1935년]] [[10월 24일]] || ||<-2> '''사망지''' ||[[중화민국]] [[베이징|베이핑 시]][br]{{{-1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 ||<-2>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제국의 관료. [[조선|조선왕조]]의 마지막 국구[* [[임금]]의 [[장인어른|장인]]을 일컫는 말이다.]이며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장인, 즉 [[순정효황후 윤씨]]의 부친.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 [[작호]]는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이다. 별명이 채무왕으로 경제관념이 제로인 것으로 유명하다. == 생애 == === 초기 === [[한성부]]에서 [[조선]] [[선조(조선)|선조]] 때의 정승이었던 [[윤두수]]의 후손인 영돈령부사로 추증된 [[윤철구]]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큰형 윤시영은 친척의 양자로 갔다. 그래서 사실상 둘째이며 세간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1899년 시강원 시종관에 임명된 것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비서원승, 영친왕부령 겸 [[혜민원]] 총무, 영친왕부 총판, 법무협판, 지돈령사사, 육군 참장·부장·찬모관을 역임했다. 1904년 4월에는 경제연구회 총재로 활동한 뒤 7월에는 광부구제회를 조직했다. 1904년 [[순명효황후|황태자비 민씨]]가 사망하자, 2년 뒤 1906년 당시 12세 된 [[순정효황후|큰딸]]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과 결혼시켜 황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윤택영은 친일보다는 항일에 가까웠다.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기 위해 헤이그에 가려고 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가는 것이 대한제국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지않기로 마음먹었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kifr.d_0004_0290_0010#self|#]] 1907년 순종 즉위 후 딸이 황후가 되자 황제의 장인 자격으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작호는 본관인 '해평(海平)'에서 유래했다. 조선의 [[부원군]] 작호는 대부분 거의 본인의 본관에서 따왔다.] 1908년 1월에는 기호흥학회 찬무부 특별주무원, 10월에 특별찬성회원을 맡았으며, 같은 해 2월에는 대동학회 회원, 9월에 상공근무사 찬성장, 그리고 10월에 일본적십자사 특별위원과 11월에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다. === 일제강점기 이후 === ||
[[파일:267ABC4B528CCCF401.jpg|width=100%]] || || 윤택영 ||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2달 뒤인 10월 16일에 [[조선귀족|조선귀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듬해 9월에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의 후작 이사를 맡았다. 이후에도 조선임업조합 보식원 간사와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불교옹호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열심히 친일을 했다. 1920년 엄청난 부채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다가 중국으로 망명, 베이징에 체류하다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35년 10월 24일 객사하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 가족 == 조부는 윤응선이다. 경흥부부인(慶興府夫人) 기계 유씨(杞溪 兪氏)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았다. 장녀가 바로 [[순정효황후]] 윤증순이고 차녀 윤희섭은 [[유길준]]의 차남이자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억겸]]과 결혼하였다. 장남 윤홍섭은 비록 아버지와 같이 채무를 피해 도망가긴 했으나 그래도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도움을 주어''' [[순정효황후]]로부터 10만원을 얻어다가 [[신익희]]에게 주면서 [[상해임시정부]] 설립 자금에 보태게 하였고 이후에도 [[장덕수]] 등의 유학 자금을 지원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1935년 11월에 귀국 후 흥업구락부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등 아버지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8.15 광복]] 후에는 [[한민당]] 창당 발기인과 심사부원을 거쳐 [[문화재청|구 왕궁청]] 사무장관, 숙명학원 이사장, 그리고 국제법급 외교연구회 이사 등을 지내고 대동청년당 상무이사 등을 지내는 등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차남 윤의섭은 형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기 때문에 윤택영 사후 그의 후작 작위를 승계받았으며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로 활동했다. 이후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전몰 장병 추도회에서 조선귀족회 대표로 참석했고 조선귀족회의 장행회에도 참석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에 앞장섰기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수작/습작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여담 == *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큰 사위 순종보다 '''2살 어리다.(...)''' 당연히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나이차이도 넘사벽으로 무려 '''20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아버지 욕심에 어린 생과부를 만든다며 황태자비를 동정했다고 한다. 사실 이럴 만도 한게, 윤택영이 황실과 사돈이 되려고 빚까지 내서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한다. * [[서울특별시]]에서는 [[남산골한옥마을]]에 [[남산골한옥마을#s-4.2|그의 사저 재실]]을 이전 복원하여 전시해놓았다.[* 이와 별개로 [[남산골한옥마을#s-4.1|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라는 이름의 집 또한 전시되어있으나 추가 조사를 통해 윤택영의 형 [[윤덕영]]의 애첩 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파일:ca81ef03fadf473ba849c3c54d460983_1479334978810.jpg|width=100%]] || === 채무왕 ===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윤택영은 [[빚]]이 많았다. 황실과 연을 맺으려 꾸었던 빚을 안갚는 것은 물론, 오히려 [[부원군]] 지위를 이용해 더 막대한 빚을 지면서까지 [[사치]]와 [[유흥]]을 즐겼다. 이로 인해 생긴 별명이 ''''채무왕'''', ''''차금대왕(借金大王)''''[* 차금(借金)은 돈(金)을 빌린다(借)는 뜻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장인을 저런 꼴로 방치하는 게 [[황실]]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고 해서 1907년에 윤택영이 당시 진 채무의 절반 금액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특별히 내주었다. 그러나 그 걸로도 부족했는지 여러 차례 사위 [[순종(대한제국)|순종]]을 찾아가 자기 빚 좀 대신 갚아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나중에는 순종이 거절했다. 그래도 믿을 건 피붙이라고 친형 [[윤덕영]]에게 돈 좀 꿔달라고 했으나 윤덕영도 동생에게 떼먹힌 돈이 꽤 있었기에 바로 거절했다. 그러자 서울 시내 한복판 [[요릿집]]에서 주먹다짐까지 했다.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에 관련 이야기가 나와있다.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윤덕영|그의 형]] '대갈 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갈대감'은 윤덕영의 별명으로 몸집에 비해 [[큰 머리|머리가 지나치게 커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심지어 [[일본 정부]]에게까지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했을 정도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경술국치|한일합방]] 당시 받은 어마어마한 금액의 은사금은 어쨌냐고? 그걸로 빚갚긴 했는데 다시 사치스런 소비생활을 하다가 또 채무를 졌다. 하도 돈을 안 갚아서, 보다못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윤택영의 재산을 저당잡고 조사에 들어갔는데, 그 때 혹시나 해서 다른 [[친일파]] [[조선귀족|귀족]]들도 조사해보니 역시나 빚에 시달려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실 이들 친일파 귀족들이 6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받긴 했지만, 문제는 그 형태가 '''50년 만기 채권'''이었기 때문에 실제 은사금은 일본은행에서 보관했고 그 이자만 받아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의외로 이들 조선귀족의 재산 증식에 은사금이 별 도움이 못 되었다고 한다. 50년 뒤에 받는다고 해도 그 동안 인플레이션 생각하면 실제 가치는 훨씬 낮아져 있을게 뻔하고, '''무엇보다 일제가 35년만에 망해버렸기 때문에...'''] 결국 일본 의회에서 명색이 일본의 귀족이 궁핍하게 살아서 되겠냐는 소리에 [[조선총독부]]에 특별예산을 편성해 [[귀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귀족|조선 귀족]]들에게 얼마 안되는 보조금은 새발의 피일 뿐이었고 금방 또 날렸다. 그래서 일본 측에서는 이를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고 결국 윤택영은 작위 박탈까지 당했다가 나중에 겨우 회복했다. ||
[[파일:2018-03-14 18-52-36.jpg|width=100%]] || || 1920년 7월 11일 출국한 윤택영 부자 관련 동아일보 기사. || 결국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도저히 감당 못 할 수준이 되자 해외로 도피할 생각을 하고 1920년 7월 11일 장남 윤홍섭과 함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채무자들에게는 예전에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가 [[위안스카이]]에게 빌려준 10만환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 빚을 갚겠다고 말하고 갔다. 그래서 빚쟁이들이 안심하고 있었는데 한 달 간 있다가 온다 해놓고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서야 눈치를 챘다고 한다. 그러나 빚을 잔뜩 지면서까지 호화롭게 살았던 몸이라 [[외국]]에서의 낯설고 초라한 생활에 적응할 리 없었고, 툭하면 [[순정효황후|딸]]과 [[순종(대한제국)|사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귀국할 수 있도록 빚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다가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그래도 [[장인어른|장인]] 겸 [[신하]]라고 [[문상]]은 해야 한다며 몰래 [[조선]]에 왔다가 윤택영이 문상을 위해 올 걸 예상하고 [[창덕궁]] 주위를 감시하던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빚 독촉을 해댔다. 위에서 언급한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에 실린 관련 내용이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 · 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이를 견디지 못한 윤택영은 상이 끝나자마자 다시 [[중화민국|중국]]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가 결국 [[객사]]하고 말았다. [각주] [[분류:조선의 국구]][[분류:대한제국의 부원군]][[분류:조선귀족 후작]][[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분류:1876년 출생]][[분류:1935년 사망]][[분류:해평 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