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삼국시대 호족들)] ---- [include(틀:고려 삼한공신)] ---- [목차] == 개요 == 尹莘達 (생몰년도 미상) [[후삼국시대]]~[[고려]]의 인물. [[파평 윤씨]]의 시조. [[태조(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 상세 ==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 속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벽상삼한익찬이등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의 관작을 받아 후손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파평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에는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묘와 재실인 봉강재가 있다. 관향인 [[파주시]]가 아닌 [[포항시]]에 시조의 묘가 있는 것은 윤신달이 동경(現 [[경상북도]] [[경주시]])대도독[* 경북 경주시가 고려 때 동경으로 승격된 것은 성종(제6대) 때이다. 동경의 장관은 동경유수(東京留守)이지 동경대도독이 아니다. 동경으로 승격되기 전엔 경주대도독부였다. 혜종(제2대) 대에 경주시는 경주대도독부였으니 혜종 당시에는 동경대도독이 아닌 경주대도독이었을 것이다.]으로 30여년간 재임하다 이곳에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 2대왕인 [[혜종(고려)|혜종]]이 이모부인 윤신달 장군을 동경([[경주시]]) 대도독으로 제수하여 [[신라]] 유민 중에서 [[고려]]에 불복하는 자를 다스리게 하였다. 윤신달은 30년을 재임하고 81세를 일기로 졸하니, 기계현 벌치동 구봉산 아래 유좌(酉坐)로 유택을 마련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5645|#]] 당시 지방 [[호족(한국사)|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유력자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했던 [[기인제도]]로 인해 윤신달의 아들 윤선지는 윤신달이 동경대도독으로 부임한 이후 임지에서 졸할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 또한 고려 삼한공신이었음에도 다른 관직을 역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경주 대도독도 [[한직]]이 아니고 굉장한 [[https://n.news.naver.com/article/016/0001842550?sid=103|중책]]을 맡은 [[요직]]이다.] 혜종 이후 [[경종(고려)|경종]]에 이르는 4대 50여년간 벌어진 호족 숙청 기간 동안 몸을 보전하기 위해 은거한 것으로 보인다. 윤신달을 경계하여 동경대도독에 임명한 후 죽을 때 까지 중앙으로 부르지 않았다고 보는 설도 있다. == 대중매체 == * 2000년작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이계영]].[* 윤신달로 출연하기 전에 드라마 초반에 철원성 부장으로 출연하였다.] 79화에서 병부령 [[복지겸]]의 소개로 부장으로 첫 등장하였고 사화진 전투에 첫 참전하였다. 2차 나주 전투 참전 이후 김언, 전이갑과 함께 나주에 잔류하였다. 이후 고려가 건국되면서 장군이 되어 송악으로 소환되었고, 박수문 형제, 왕충과 함께 마지막회까지 등장하며 중간급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 2003년작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그의 후손인 [[윤인첨]]이 등장하며, 이의방과 윤인첨의 대화에서 윤신달의 이름이 언급된다. 조위총의 서경 반란군을 진압할 지휘관으로 윤인첨이 임명되자 "저 윤신달 장군의 후손이시니 잘 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라고 한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파평 윤씨, version=337)] [[분류:파평 윤씨]][[분류:몰년 미상]][[분류:태조 왕건/등장인물]][[분류:고려의 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