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 [include(틀:관학파)] ---- {{{+1 尹紹宗 }}} [[1345년]] ~ [[1393년]] [목차] == 개요 == [[여말선초]]의 인물.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윤택의 손자. 본관은 무송. [[이제현]]과 [[이색(고려)|이색]]의 제자이며 [[신진사대부]]로, 고려 대과에 장원급제했고 저술에 큰 재능을 보여 역사 편찬의 업무를 맡아 출사하였고 이후 간관이 되어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와 내시들을 극언하는 소를 올렸으나 좌절되었다. 고려에 깊은 회의를 느낀 그는 이후 [[조준(조선)|조준]], [[정도전]]과 어울리며 과격함과 과단성으로 [[이성계|태조 이성계]]의 정치적 돌격대장 역할을 했다. [[신진사대부|고려파 사대부]]나 [[권문세족|권문세가]]들에게 당여들이 밀릴 때마다 직접 과격한 상소를 올리거나 동지들을 규합해 불리한 조정 여론을 돌파했다. 타협을 모르는 성정으로 정적들이 많았고 태조에게도 정치적 부담을 안기기도 해, [[정몽주]] 등 고려파 사대부들의 참소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정몽주 암살 후 돌아왔지만 건강을 크게 해친 후였다. 회군 3등 공신에는 책록됐지만 조선 건국 이듬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영화를 다 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아닌 고려 공신이다.] 경서에도 정밀했다는 평가이다. [[집현전]] [[대제학]] [[윤회(조선)|윤회]]의 아버지이다. == 생애 == 총명하고 민첩하면서 학문을 좋아해 20세가 되기 전에 시문에 익숙해 [[이제현]]이 기이한 재주라 여겼으며, [[공민왕]] 때 조선의 대과와 같은 예부시에서 을과 1등을 하여 선발되었다. 급제자 중 저술 실력이 가장 뛰어나 춘추수찬(春秋修撰)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좌정언이 되었다. 이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 김흥경과 내시 김사행이 병국해민(病國害民)한다는 극언의 소를 올렸는데 이때부터 말투가 강했다. 황제가 좋아하는 신하들을 두고 그들이 임금의 뜻에만 맞추어 나라를 피폐하게 한다는 주장과 함께, [[충렬왕]] 때부터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왕이 놀러다닐 때가 아니라면서 김광대를 참수해 석실 공사를 중지하고 화원을 부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공민왕에게 상소가 올라가기 전에 여러 달 동안 휴가를 내고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역으로 탄핵 당하여 파직되었다. [[우왕]] 때 전교시승, 성균관사예, 전의부령, 예문관응교 등을 차례로 역임했고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집이 매우 가난했는데, 이존성이 우왕에게 이야기해 쌀 열 석을 하사받고 전교부령이 되었다.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고 이성계에게 [[곽광]]의 전기인 곽광전을 바쳤고 [[창왕]] 때 전교령이 되자 옛 제도를 따르고 축문, 사소와 종묘, 적전의 제사를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도록 건의했으며, 우사의대부가 되고 [[이인임]]의 죄를 논의했다가 등창으로 휴가를 청해 그 틈에 상소가 중지되었다가 대사성으로 승진해 이인임의 죄를 논의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공양왕]] 때 [[조준(조선)|조준]]의 천거로 좌상시, 경연감독관이 되었으며, 과거에 조준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공양왕 때 많은 상소를 올렸다. * [[이숭인]]이 [[과전법|전제개혁]]에 반대하고 고려파 사대부들과 권문세족을 연합시키려 하자, 영흥군의 옥사를 빌미로 이숭인을 참소. * [[변안열]]이 우왕 폐위를 반대하고 반기를 들 낌새가 보이자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림. * 공양왕에게 [[정관정요]] 대신 대학연의[* 중국 송나라 진덕수(眞德秀) 작으로 조선시대에는 [[세조(조선)|세조]]의 명으로 이석형(李石亨, 1415년 ~ 1477년)이 [[대학연의집략]]을 편찬하기도 하였다.]를 강의받아야 한다고 상소.[* 정관정요는 국가를 다스리는 경륜을 담은 책으로 제왕만이 읽을 수 있었다. 세자가 아닌 왕자가 읽으면 역심을 오해받을 정도의 책이었다.] * 우왕, 창왕을 유배지로 호송한 신하들에게 공신호를 내려주는 것을 반대했지만 거부됨. * 승려 찬영을 왕사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 왕실과 고려 국교였던 불교 기득권 간의 결탁을 끊으려 함. * 직접 건의하는 제도를 폐지하자 반대 상소를 올림. * 공양왕이 장당현으로 행차할 계획 국고를 낭비하는 대규모 행차 계획을 반대. 장당현으로 행차하는 것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예의판서로 승진했다가 송문중에게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윤소종은 동서 최을의와 노비를 두고 다투다가 반복해에게 청탁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상시가 되어 시비를 자주 벌여 왕의 미움을 샀다가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공양왕]]의 귀에 들어갔으며, [[정몽주]]의 탄핵을 받아 윤소종은 금주로 유배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하려 끝까지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태종(조선)|이방원]]의 손에 정몽주가 죽은 후에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1392년 10월 13일에 병조전서를 지내면서 [[조준(조선)|조준]], [[정도전]], 정충, 박의중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1393년 8월 2일에 병으로 사직했다가 9월 17일에 사망했다. == 여담 == * 철저한 [[유교]]([[성리학]]) 원리주의자였다. [[조선]]이 성립된 다음, [[태조(조선)|태조]]가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성석린]] 등과 함께 척불상소를 올려서 불교 척결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쉽게 말해 불교라면 치를 떠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러가지로 당대 관인들보다는 후대 [[사림]]과 비슷하다고 보여질 정도로 철저하게 유교원리주의를 주장한 인물.[* 사실 [[여말선초]] 당시의 신진사대부들은 일단 국시로 유교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직 유교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래서 [[세조(조선)|세조]] 때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유교를 주장하면서도 [[스님]]이랑 같이 놀거나 유학을 탐구하기보다는 문장을 아름답게 하는데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본격적인 유교원리주의의 등장은 [[성종(조선)|성종]] 이후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해서 이들이 [[사림파]]를 이루게 된다.] * 지독한 [[공민왕]] 바라기였다. 그의 문집인 동정집을 보면 엄청난 양의 공민왕에 관련된 한시들이 나오는데, 공민왕이 살아 있던 시절엔 공민왕을 찬양하던 시들이 있었고, 공민왕 사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공민왕을 그리워하는 시들을 많이 남겼다. 동정집의 문헌을 읽어보면, 윤소종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공민왕 '''생전'''과 공민왕 '''사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공민왕이 죽은 이후에 전조를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한다는 시를 짓기도 했다. 물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이후로도 공민왕에 대한 애절한 충심은 변하지 않아서 [[꿈]] 속에서 공민왕이 나와서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의 시도 있는 걸 봐서는 죽을 때까지 공민왕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어느 날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정몽주]]에게 [[정관정요]]를 강독하게 했는데, 이때 윤소종이 "군주로서 [[삼황오제|요순]]과 삼대[* 고대 [[중국]]의 세 왕조 [[하나라|하]], [[상나라|은]], [[주나라|주]] 왕조를 이른다.]를 모범으로 삼아야지 [[당태종]]은 따를 것이 못 된다"라며 정관정요 대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권했다고 한다. 두 책 모두 군주의 치세를 다루지만, 정관정요는 특히 강한 왕권으로 제국을 이룬 당태종의 제왕학을 다뤄, 공양왕이 이성계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주제에 정치적 야심을 보인 데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윤소종은 아직은 명목상 고려의 신하였고 왕을 능멸한 셈이지만 유교적 이상향인 조선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거침없었다. * 저서로는 동정집이 있으며, 그의 아들이 [[세종(조선)|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인 [[윤회(조선)|윤회]]인데, '[[구슬]] 삼킨 [[거위]] 때문에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 대중매체에서 ==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드라마)|개국]]>에서는 배우 [[이신재]][*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박지윤(고려)|박지윤]] 역.]가 연기했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박웅(배우)|박웅]][*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정인지]] 역,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에서는 [[양녕대군]] 역.]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사제 관계를 비롯해 당시 [[사대부]] 사이의 인간 관계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지는 않은데다 원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임팩트가 크지는 않았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배우 [[이병욱(배우)|이병욱]]이 연기했다. 꼿꼿한 성격, 독설, 프로 [[어그로]]꾼, 아가리 파이터 등의 강렬한 [[캐릭터]]로 윤소종의 대중적 [[인지도]]를 확 올려줬다. 덕분인지 [[나무위키]]에서는 실존 인물로서의 항목보다도 [[드라마]] 캐릭터로서의 항목이 먼저 생성되었을 정도인데 각색된 점이 있긴 했지만 실제 성격을 고스란히 묘사한 편이다. [[윤소종(정도전)|문서]] 참고.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특정 배역으로 출연하지는 않는다. [[위화도 회군]] 이후 [[태조(조선)|이성계]]에 의해 성균대사성으로 추천되었다는 언급이 잠깐 나오는 것이 전부. 이후 극이 폭풍 전개되어 1394년 이후로 시점이 바뀌면서 1393년 사망한 그로서는 등장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박유승이 연기했다. 그런데 실수로 1394년 시점인 11회에서까지 살아있게 되어 해당 오류는 본작의 옥에 티 중 하나가 되었다. == 같이보기 == * [[공민왕]] * [[신진사대부]] [각주] [[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무송 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