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윤보선)] [include(틀:윤보선)]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윤보선]]의 일생을 서술한 문서. == 생애 == === 어린 시절 ~ 대통령 === [[윤웅렬]], [[윤영렬]] 형제를 필두로 [[구한말]]에 유력 가문으로 떠오른 [[해평 윤씨]] 집안 출신이다. 윤영렬의 차남인 [[윤치소]]의 장남으로, [[윤치호]]가 당숙, [[윤치성]]과 [[윤치영]]은 숙부다. [[해평 윤씨]] 문서로. 다만, 윤치영이 매우 늦둥이라 조카인 윤보선이 삼촌인 윤치영보다 1살 많다. 21세이던 [[1918년]] [[상하이시]]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신규식]], [[신익희]]의 권유로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유학을 다녀왔다. 당시 별명이 "영국신사".[* 이때 [[피아트 컨버터블]]을 구입해서 타고 다녔는데 전교생 중 유일하게 자동차를 가진 학생이라 동양에서 온 왕자님으로 오해받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물론이고 서유럽권에서도 자가용 보유하면 잘사는 집안이었던 시절이었다. 당장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자가용은 부의 상징이였는데, 1920년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귀국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등 요로를 통해 집요한 협조를 강요받았으나, [[석왕사]]에서 은신하며 일체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인과 사별하며 여식만 남겨두고 있던 터라 일본의 협박이 잘 먹히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문중회의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홀로 거부하기까지 했다.[* 가문의 창씨는 이동(伊東, 이토)이었다. 친일행위가 존재한 [[윤치호]]는 '이동치호'로 창씨개명했는데, 사람들은 '이 똥 치워'라고 조롱했다.]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한다. [[미군정]]에서 농상공국 고문을 맡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서용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에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이 독선적 태도를 견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멀리하자 상공부장관을 사퇴하였다. [[6.25 전쟁]] 중 [[국민방위군 사건]],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1955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들어선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에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을 역임했다. 하지만 당시는 [[의원 내각제]] 체제였기 때문에 실권을 행사했던 총리에 비해 대통령의 권력은 많이 억제되어 있었고, 9개월 정도가 지난 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서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가진 기간도 짧았다. 당시 실권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 [[국무총리]]가 행사하고 있었다. 역임 1년여 만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하야하려 했는데 당시 반응은 새벽에 보고받았던 "올 것이 왔다"였다.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주한미대사와 UN사령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한림]] 중장을 저지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임기 중 대통령 관저의 이름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고, 이는 제19대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졌다. 아래에서 설명하듯 존재감 없는 대통령이면서도 후대로 이어질 자신의 흔적을 남긴 점에선 아이러니하다. === 사임 이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윤보선 말년?.jpg|width=100%]]}}}|| || '''대통령직 사임 이후 시간이 흘러 무궁화대훈장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 || 대통령치곤 존재감이 참 없는 편이고 또 다른 미미한 존재감의 대통령 [[최규하]]와 함께 엮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교과서에서는 제2공화국, 의원 내각제, 양원제 등으로 인해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을 꽤 비중있게 다루는 편.[* 다만, 교과서에서 이 시절을 일컫는 말은 [[장면]] 내각이고,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의 업적 대부분이 그냥 장면이 한 일로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하게 국무총리한테 실권, 인지도가 모조리 밀린 대통령인 셈. 의원내각제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얘기이다.] 따지면 또 지금과 달리 리즈 시절엔 나름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게, [[제5대 대통령 선거|5대 대선]], [[제6대 대통령 선거|6대 대선]]에 두 차례나 유력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대통령 선거 대결을 했으며, 특히 [[5대 대선]]의 경우는 역대 대선 중 가장 표 차이가 적게 났다. 여담으로 이때 윤보선은 과거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전력을 들춰냈고, 이에 박정희는 [[매카시즘]]([[종북몰이]]) 하지 말라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반면, 박정희 측에서는 윤보선 일가[* 숙부, 당숙들이 일제에 부역하였고, 당장 부친 윤치소도 조선총독부 간부로 역임했다. 당숙 중에 [[윤치호]]도 있다.]의 친일이력을 지적하였다는 점도 더욱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윤보선의 색깔몰이로 정작 남부 지역에 해당하던 영호남과 제주도에선 윤보선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투표 결과 남북 지역 대결 양상이 되기도 하였다.[* 서부경남, 전남 지역은 [[남조선로동당]] 유격대의 활동으로 피아를 구분 없이 숱한 인명이 사라진 지역이었다. 특히 전남의 경우 한국전쟁 기간 정규군과의 교전도 없었는데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제주도는 [[4.3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5대 대선에서는 이 세 지역(전남 57.2%, 경남 61.7%, 제주 69.9%)의 박정희 득표율이 경북(55.6%)보다 높았다. 사실 이땐 대구경북에서 오히려 반이승만 성향의 좌파 세력이 위력을 떨치던 시기기도 했다.] 게다가 귀족적인 성향의 윤보선에 비해,[* 약간 [[결벽증]] 비슷한 증세도 있었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 소작인 농사꾼 자식임을 강조한 박정희에게 농민 표가 많이 간 탓도 있었다.[* 지역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이전 선거 양상은 [[여촌야도]] 현상이 강해, 시골 지역에선 박정희 지지율이 더 나오고, 대도시 지역에서는 윤보선 지지율이 더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지역적으로 일반화하긴 매 선거마다 패턴이 달라 애매하긴 하다. 참고로 이런 상황은 이농현상으로 시골 인구가 급감하자 많이 약해진다.] 첫 번째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 다음에,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후로 정신적 지주 등 '정신적'이라는 말이 꽤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2번째 대선 도전에서도 낙선하며 체면을 구긴다. 그래도 5.16 정변 이후 해산된 민주당 구파(사실 5.16 직전에는 [[신민당(1960년)|신민당]]) 세력을 규합하여 [[민정당]]을 창당하고[* 풀네임 자체가 민정당이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의 [[민주정의당]]과는 전혀 다른 정당.] 총재로서 제법 오래 정치를 하긴 했다. 이후 [[민중당(1965년)|민중당]]과 [[신한당]]에 몸담다가 [[신민당(1967년)|신민당]]으로 통합. 1971년 신민당의 [[유진산]] 체제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국민당(1971년)|국민당]]을 창당하였다. [[10월 유신|유신]]시대에도 [[김대중]] 등과 함께 사회 원로로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이끌던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에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던 14살 연하의 부인 [[공덕귀]]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대에는 민주 진영에서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용]].]의 대표 '윤'이라고 불리기도. 참고로 윤보선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당시 운동권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가던 반미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윤보선이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중도에 가까웠던 성향 때문에 민주당의 원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인사들에게 비난을 받아왔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교회사학자 김명구 박사는 2011년에 낸 평전 <해위 윤보선>에서 김대중, [[김지하]] 등 재야인사들의 석방에도 나섰던 점을 들면서 신군부에 협력한 사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https://www.yna.co.kr/view/AKR20111115210600001|반박했다]]. 다만, 그의 비서를 지낸 [[조종호]]나 [[김정례]] 등이 민주정의당에 [[http://egloos.zum.com/nasanha/v/10810178|입당]]했고, 말년에는 [[노태우]]를 공개 지지 선언하기도 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id=19990316006001&keyword=%E5%BC%B5%E5%8B%89|#]]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윤보선19801022.jpg|width=100%]]}}}|| ||'''1980년 10월 22일 열린 제8차 헌법 개정안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석하여 인터뷰하는 모습.'''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윤보선19900309.jpg|width=100%]]}}}|| ||'''사망 4개월 전이었던 1990년 3월 9일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훗날 [[김영삼|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자택으로 방문해 문병한 당시의 사진으로 공식상에 나온 생전 마지막 모습이다.'''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윤보선 전 대통령 영정.jpg|width=100%]]}}} || || {{{#ffc224 '''윤보선 대통령 공식 영정'''}}} || 1986년부터 역사단체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현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를 발족해 초대 의장을 지내다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어쨌거나 대통령을 지냈기에 현충원에 안장될 수도 있었지만, 그가 죽기 전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을 거부하여[* [[박정희]]랑 같이 안장되기 싫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다.] 시신은 현충원에 안장되지 않았다. == 묘소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poongsoojiri.co.kr/5cbdf4aca8bbf415e7cc52596eaf078a225651.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egye.com/aa0330-45-2.jpg|width=100%]]}}}|| ||<-2>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에 위치한 해위(海葦)[*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바다 '해'와 갈대 '위'를 썼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B%B3%B4%EC%84%A0|위키피디아 내용]] ]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선영.[* 또 역장이라고 하는데, 조상산소 윗쪽에 후손의 묘라는 뜻이다.] || 윤보선은 유서에서 화장해 봉하마을에 묻히길 원했던 [[노무현]], 현충원에 묻힐 수 없게 된 [[노태우]], [[전두환]]과 함께 현재까지 [[국립현충원]]에 묻히지 않은 대통령 중 한 명이다. 자신이 독재자로 규탄했던 박정희와 같이 묻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점을 내세웠다. 대신 노무현, 노태우 묘역과 함께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어 있어서 사실상의 국립묘지 대우를 받는다.[* 나머지 대통령들 묘지는 국립묘지라서 자동으로 보호되나 국가보존묘지는 특별법으로 보호된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안장비를 국가가 부담하는 국립묘지와 달리 유족들이 부담해야 하는 정도. [[온양온천역]]에서 [[아산 버스 240|240번]]을 타고 동천2리에서 내리면 입구가 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윤보선, version=1051)] [[분류:윤보선]][[분류:인물별/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