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분류:종로구]][[분류:서울특별시의 역사]]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pdjournal.com/57265_51232_5216.jpg|width=100%]]}}} || || '''조선시대 육조거리를 재현한 모형'''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QgwlGe6H.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blog.joins.com/%EC%84%9C%EC%9A%B8%EC%98%9B%EB%AA%A8%EC%8A%B5%2009.gif|width=100%]]}}}|| || '''조선 말기 육조 거리와 광화문'''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 [[육조]]의 관청가. [[조선]] 건국 후 [[한양]] 천도 당시에 계획되어 [[경복궁]] 앞으로 [[의정부]], [[삼군부]], [[육조]], [[한성부]] 관아가 세워지면서 형성됐다. 현대에는 [[광화문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 범위 == 도로의 북측 종점에 왕궁 정문인 [[경복궁 광화문]]이 있고 그 앞으로 지금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의 [[육조]] 관아, 그리고 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역할을 하는 [[삼군부]]와 [[서울특별시청]]의 전신인 [[한성부]] 관아까지 모두 지금의 [[광화문광장]] 양 옆으로 모여있었다. 육조거리의 최남단은 현재의 [[세종대로]] 사거리([[동아일보#사옥|동아일보 사옥]]·[[광화문#s-1.2]]사거리)까지였다. 또한 육조거리 이남은 현대의 모습과 달리 [[청계천]] 이남부터는 환히 트여있던 구조는 아니었다. '''세종대로 사거리(광화문광장 사거리, 동아일보 사옥)까지가 육조거리의 끝'''이었고, 그 이남으로는 군락이나 작은 길이 있었다. 이남에 대한 설명은 [[태평로(서울)|태평로]] 문서 참고. == 역사 == 1395년 [[정도전]]이 [[태조(조선)|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으로 [[천도]]하며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큰 길을 낸 것이 현 광화문광장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육조거리이다. 1396년(음력 태조 5년 4월), [[한성부]] 행정구역을 5부(五部)로 나누면서 북부 관광방(觀光坊), 서부 적선방(積善坊)과 여경방(餘慶坊), 중부 서린방(瑞麟坊), 징청방(澄淸坊)이 나누어 이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 중 관광방은 임금의 덕이 빛나는 것을 본다는 뜻이니, 빛으로 교화한다는 뜻을 담은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의 앞 동네로서 적절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왕실은 폐허가 된 [[경복궁]]을 떠나 [[창덕궁]]에서 기거하였으나, 육조거리는 여전히 조선의 행정적 중심이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火山)'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2/2010090202077.html|#]] 조선시대에는 이 길에 경복궁과 다르게 통일된 이름은 없었고, 광화문 앞길, [[관아]]거리, 육조거리, 육조 앞길, 궁궐 앞길 등을 혼용해서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에 경복궁과 광화문은 복구되지 못했지만 육조와 한성부 등 주요 궐외각사는 여전히 이곳에 위치했다. 1751년([[영조]] 27)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에는 북부 관광방의 관광방계, 의정부내계와 서부 적선방의 당파동계, 공조후동계, 사온동계, 도렴동계, 서부 여경방의 신문내계, 장생동계, 두석계, 해풍군계, 서학동계, 내계, 동령동계, 중부 서린방의 일영대계, 중부 징청방의 두석동계가 각각 이 일대를 관할하는 것으로 나온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cha.go.kr/1614915.jpg|width=100%]]}}} || || {{{#fff ''' 〈도성도〉, 18세기 후반 제작, 보물 제1560호.[[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5600000,11|#]] '''}}} ||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한양의 도성도에 당시 도로 모습이 보인다. 오늘날의 지도와 다르게 남북이 뒤집혀 있는데, 왕이 궁궐의 어좌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지도 한 가운데에 동서축으로 나있는 도로가 오늘날의 종로이고, 6시 방향에 凸모양처럼 생긴 정원같은 공간이 창덕궁과 [[창경궁]], 그 오른쪽 5시 방향에 있는 네모난 공간이 경복궁이다. 경복궁 가운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붉은 선이 과거의 육조거리이다. 현재의 세종대로에 해당하는 구 [[태평로(서울)|태평로]] 지역의 도로는 조선시대에는 주 도로가 아니었다. [[서울시청]] 서편을 통과하는 세종대로 부분은 과거에는 경운궁([[덕수궁]])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대한제국]] 때에 와서 개통한 태평로는 정식 도로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로]]가 [[숭례문]]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주도로였다. 괜히 [[종각]]이 그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종각 자리가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 여담 == 흔히 [[당나라]]의 [[장안성]], [[신라]]의 [[서라벌|금성]], [[발해]]의 [[상경성]], [[일본]]의 [[헤이안쿄]]처럼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도시 구조에서 보이는 주작대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 관련 문서 == * [[육조]] * [[세종로]] * [[광화문광장]]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세종대로, version=320, title2=세종로, version2=213, title3=광화문광장, version3=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