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fff 연국공(兗國公)[br]{{{+1 陸元方 | 육원방}}}}}}''' || || '''{{{#fff 작호}}}''' ||<(> 연국공(兗國公) || || '''{{{#fff 성}}}''' ||<(> 육(陸) || || '''{{{#fff 이름}}}''' ||<(> 원방(元方) || || '''{{{#fff 자}}}''' ||<(> 희중(希中) || || '''{{{#fff 부친}}}''' ||<(> 육현지(陸玄之) || || '''{{{#fff 출생}}}''' ||<(> 639년 ~ 701년 || || '''{{{#fff 출신}}}''' ||<(> 소주(蘇州) 오현(吳縣) || || '''{{{#fff 국적}}}''' ||<(> 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 [[무주(당나라)|무주]]의 재상으로 자는 희중(希中). [[육상선]]의 아버지이다. == 생애 == 소주(蘇州) 오현(吳縣) 출신으로 639년에 육현지(陸玄之)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명경과에 급제하여 삼수현(三水縣), 부풍현(扶風縣), 위남현(渭南縣)의 현위를 역임했고 이후 감찰어사를 지냈다. 690년 [[측천무후]]가 제위에 오른 뒤에 영외를 위무하고 돌아와 전중시어사가 되었다. 이후 봉각사인[* 중서사인의 측천무후 재위기의 명칭이 봉각사인이었다.]으로 승진하고 시랑을 겸임했다. 그리고 내준신으로부터 모함을 당하였지만 측천무후가 사면해주었다. 693년 난대시랑[* 문하시랑의 측천무후 재위기의 명칭이 난대시랑이었다.], 동봉각난대평장사가 되었고, 694년에 봉각시랑이 더해졌다. 695년 이소덕이 죄를 얻자, 육원방은 이소덕에 연루되어 수주(綏州)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천관시랑[* 이부의 측천무후 재위기의 명칭이 천관이었다.], 상서좌승으로 전임되었으며, 사위경을 겸하였다. 699년에는 다시 난대시랑, 동봉각난대평장사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육원방에게 궁 밖의 일을 묻자, 육상선은 민간의 자질구레한 일로 황제를 번거롭게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가 태자좌서자로 폄관되고 지정사에서 파면되었다. 이후 문창좌승으로 전임되었다가 701년에 병으로 죽었고 월주 도독으로 추증되었다. 730년에는 다시 양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다. == 기타 == 어떤 사람이 육원방이 자신의 친구들을 관리로 선발한다고 고발하자, 측천무후는 육원방을 면직시켰지만 예전과 같이 인재를 천거하자 측천무후가 여기에 대해 물었는데, 육원방은 "자신이 아는 사람만 천거할 뿐이지 그 사람이 친구든 원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친구인 [[최현위]]를 측천무후에게 천거하였다.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39년 출생]][[분류:701년 사망]][[분류:쑤저우시(장쑤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