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include(틀:송말삼걸)] ||<-2> {{{#ece5b6 '''{{{+1 송말삼걸(宋末三傑)[br]남송의 충신[br]{{{+1 陸秀夫 | 육수부}}}}}}'''}}}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파일:external/img.todayonhistory.com/2B215235456.jpg|width=100%]]}}}{{{-2 [[광둥성]] [[선전(도시)|선전]]에 있는 그의 석상.}}}[* 업혀 있는 남자아이는 [[남송]]의 마지막 황제 [[소제(송)|소제]]이다.] || || '''{{{#fff 이름}}}''' ||육수부(陸秀夫) || || '''{{{#fff 자}}}''' ||군실(君實)/연옹(宴翁) || || '''[[아호|{{{#fff 호}}}]]''' ||동강(東江) || || '''[[주군|{{{#fff 주군}}}]]''' ||[[이종(송)|송이종]] → [[도종(송)|송도종]] → [[공종(송)|송공종]] → [[단종(송)|송단종]] → [[소제(송)|송소제]] || || '''{{{#fff 생몰}}}''' ||[[1237년]] [[11월 8일]] ~ [[1279년]] [[3월 19일]]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obadiah2004.com/Loyalty_017.jpg]]}}} || 남송의 관료. 초주 염성 출신. 자는 군실(君實)[* 송사 열전 제 210/충신6 중 陸秀夫,字君實,楚州鹽城人。] 또는 연옹(宴翁)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다. [[장세걸]], [[문천상]]과 함께 송말삼걸(宋末三傑) 중의 한사람이다. == 생애 == === 역사에 등장하다 === 1256년, 역시 남송의 마지막 충신이던 [[문천상]]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급제 후 진사(進士)가 되어 예부에서 활약했다. 그러다 1276년 [[항저우|임안]]이 [[원나라]]에게 함락되면서 [[송공제]]가 항복하자,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한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이 세 사람은 [[송단종|익왕 조하]], [[송소제|위왕 조병]] 등의 어린 황자들을 데리고 임안을 떠나 길고 긴 방랑길에 오른다. === 망국의 마지막 황제의 스승 === 방랑길에 오른 직후 세 충신들은 회의를 거쳐 나이가 많던 조하를 황제로 올렸으니, 그가 [[송단종]]이었다. 동남 지방의 해안선을 따라 항전을 계속했지만, 이미 머릿수가 많은 원나라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호족들도 하나 둘씩 원나라에 항복하고 있었다. 특히 화남 지방의 재력가 회족 출신의 포수경을 포섭하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그런 와중에도 육수부는 어린 황제인 송 단종과 그 아우 위왕 조병의 스승 역할을 계속해서 하였다. 하지만 현재의 [[푸젠 성|복건성]] 근처에서 9세의 단종이 태풍으로 인해 익사할 뻔한 충격으로 죽게 되자, 결국 위왕 조병을 황제로 올리게 되니, 그가 마지막 황제 [[송소제]]이다. 그 때 소제의 나이 겨우 7세. 이후 [[홍콩특별행정구|홍콩]] 근처의 어느 섬에 임시로 황궁과 거처를 잡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 나라와 같이 죽다 === 하지만 이미 [[원나라]]는 상대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당대 세계 최강의 몽골군한테 수도까지 뺏겨서 상태가 사실상 망한거나 다름이 없던 남송이 [[버틸 수가 없다|버틸 수 없는]] 상황. 1279년 2월, 형세가 불리하다고 느낀 [[장세걸]]은 [[배수진]]을 친다는 각오로 '''[[거록전투|섬에 있던 황궁과 거처를 모두 태우고]]''' 모든 병력을 배 위에 올렸다. 그리고 [[연환계|배들을]] [[적벽대전|모조리]] [[방통|묶었다]]. 물론 배에다가 진흙을 발라서 불이 쉽게 안 붙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 상황에서 육수부는 여전히 어린 황제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이 교육시키고 있었다. 소제도 육수부도 황제와 그의 스승이라 하여 특별 대우는 받지 않았고 배 위에서 신하와 병사들과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온갖 고생을 하였다. 1279년 3월, 결국 남송은 현재의 [[홍콩]] 또는 [[마카오]] 인근인 애산까지 밀려났고, 마침내 [[원나라]]가 마지막 공격을 개시했다. 송의 잔여 병력들과 장군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도 육수부는 어린 황제에게 경서를 강독하고 있었으나, 원나라 병력들이 아주 가까이까지 오자 어린 황제를 껴안고 >'''국사가 지금 허무하게 패했으니 폐하께서도 또한 순국하심이 옳습니다. [[공종(송)|덕우 황제]]의 전철을 되풀이 하시면 안됩니다. 덕우 황제께서 원나라의 [[베이징|대도]]에서 모욕당하시는 것도 견딜 수 없사온데 폐하께서도 그런 능욕을 당하게 할 순 없사옵니다.''' 하고 말을 하였고 소제는 >'''다시는 왕후장상의 씨앗으로 태어나지 않겠다!''' 하는 말을 남기고 남중국해 바다에 같이 투신하여 죽었다.[* 독일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소설가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이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때 송 왕조의 옥새도 함께 가지고 뛰어내렸다는데 이 옥새가 [[전국옥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죽음을 끝으로 [[남송]]도 같이 멸망했다. 이것이 바로 남송의 최후를 알린 전투인 [[애산 전투]]의 마지막이었다. 이후 광동성 바닷가나 홍콩, 마카오 일대 여기저기에 송황대(宋皇臺)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심지어 [[홍콩]] [[구룡반도]]에는 송웡토이(Song Wong Toi) 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게 그대로 [[튄마선 1단계]] [[송웡토이역]]이 되었다. == 평가 == [[충신|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켰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육수부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가솔들도 먼저 투신자살할 것을 지시하였을 정도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계백|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명예살인]], [[살해 후 자살]]이라고 비판할 수 있으나, 이때는 충이 곧 미덕인 시대였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며(한국에서 위인으로 평가받는 계백 또한 백제 멸망 당시 본인의 처자식을 본인손으로 죽였다.) 어차피 최후의 최후까지 결사항전을 하였으니 설령 살아남는다 쳐도 다른 병사들처럼 전부 몰살 당했거나, [[장세걸]]처럼 태풍에 휘말려 죽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다. 육수부의 그런 선택은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자신과 가솔들 뿐만 아니라 끝까지 충성을 바치던 황제까지도 적에게 살해당하는 치욕을 면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 자결했다는 점에서 고작 [[명예 살인]] 같은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 대중매체에서 == === [[징기스칸 4]] === 이상하게도 문천상, 장세걸과 달리 능력치 총합이 매우 낮다. 물론 정치는 장세걸보다 높지만(69 이벤트로 74) 둘에 비해 활용도가 떨어진다. 전반적으로 문관들에 대한 대우가 짠 게임이니 어쩔 수 없을지도. 다만, 남송 멸망 이벤트에서 매우 카리스마 넘치게 나온다. 어린 황제를 껴안고 바다에 투신하는 것은 실제 역사와 같지만, 투신 직전 원나라 병사들에게 "두고 보아라 오랑캐들아! 언젠간 [[주원장|우리의 후손]]이[* [[홍무제]]는 실제로 [[애산 전투|이 전투]] 생존자의 외손자이다.'''] [[명나라|너희를 도모할 것이다!]]"라며 경고한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237년 출생]][[분류:1279년 사망]][[분류:중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익사한 인물]][[분류:옌청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