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劉休茂[br]유휴무}}}''' || || '''작위''' ||해릉왕(海陵王) || || '''성''' ||유(劉) || || '''자''' ||휴무(休茂) || || '''부모''' ||부황 [[문제(유송)|문제]][br]모친 미인(美人) 채씨(蔡氏) || || '''생몰''' ||445년 ~46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남조)|유송]]의 황족으로 자는 휴무(休茂)이다. == 생애 == [[문제(유송)|문제]]의 14남으로 모친은 미인(美人) 채씨(蔡氏)이며, 445년에 태어났다. 455년, 해릉왕으로 봉해지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457년, 사지절(使持節)·도독옹량남북진4주영주경릉수2군제군사(都督雍梁南北秦四州郢州竟陵隨二郡諸軍事)·북중랑장(北中郞將)·영만교위(寧蠻校尉)·옹주 자사가 되었다. 뒤에 좌장군(左將軍)으로 진호되었다. 당시 사마 유심지(庾深之)가 사무를 대행하고 있었는데, 유휴무는 성격이 급해서 자신이 사무를 주관하려다가 유심지와 다퉈서 유심지에게 원한을 품었다. 유휴무의 측근인 장백초(張白超) 또한 여러 차례 죄를 지어 두려움에 떨다가 어느날 유휴무에게 거병을 권했다. 유휴무는 장백초의 말을 믿고 거병하여 황령기(黃靈期), 채첩세(蔡捷世), 등목지(滕穆之), 왕보룡(王寶龍), 내승도(來承道), 팽숙아(彭叔兒), 위공자(魏公子), 진백아(陳伯兒), 장사노(張駟奴), 양흥(楊興), 유보(劉保), 여쌍(余雙) 등을 이끌고 전첨(典籤) 양경(楊慶), 사마 유심지, 전첨 대쌍(戴雙)을 살해하였다. 이후 스스로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유휴무가 거병할 때 시독박사(侍讀博士) 순선(荀詵)은 유휴무에게 간언을 했다가 살해되었고, 장백초는 군정을 전담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실패하여 자살하였다. 조만기(曹萬期)는 유휴무를 막으려다가 도리어 자신이 살해되었다. 자의참군(諮議參軍) 심창지(沈暢之)는 성문을 닫고 유휴무의 입성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의성군(義成郡) 태수 설계고(薛繼考)가 유휴무에게 호응하여 성을 공격하자,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그러나 심창지가 죽은 날에 참군 윤현경(尹玄慶)이 거병하여 유휴무를 사로잡았다. 유휴무는 성을 나서려다가 참수되었고 유휴무의 모친과 부인은 자살했다. 관리들은 유휴무를 황실 족보에서 삭제하고 유휴무의 성을 유(留)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했으나 [[효무제(유송)|효무제]]는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분류:송(남조)/황족]][[분류:445년 출생]][[분류:461년 사망]][[분류:팽성 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