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후한 말의 황족, rd1=유총(진민왕), other2=후한 말의 관료, rd2=유총(후한), other3=전조의 3대 황제, rd3=유총(전조))] [include(틀:후한서)] [include(틀:후한의 태위)] ||||||||||||<:> '''[[사도|{{{#ffffff 후한의 사도}}}]]''' || || 41대 [[호광]] || {{{+1 ←}}} || '''42대 유총''' || {{{+1 →}}} || 43대 [[허훈(후한)|허훈]] || ||||||||||||<:> '''[[사공|{{{#ffffff 후한의 사공}}}]]''' || || 38대 황경 || {{{+1 ←}}} || '''39대 유총''' || {{{+1 →}}} || 40대 [[주경]] || ||||||||||||<:> '''[[사공|{{{#ffffff 후한의 사공}}}]]''' || || 43대 [[왕창(후한 사공)|왕창]] || {{{+1 ←}}} || '''44대 유총''' || {{{+1 →}}} || 45대 [[허허#s-2]] || 劉寵 ? ~ 169년?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후한]] 말의 황족이며 자는 조영(祖榮)으로 [[유대(삼국지)|유대]], [[유요]] 형제의 백부. 청주 동래군 모평현 사람. [[고제(전한)|한고조 유방]]의 아들 제왕 [[유비(전한)|유비]](劉肥)의 후손[* 한고조 유방의 장자로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한 서자라는 이유로 황제가 되지 못했다.]이자 유비(劉丕)의 아들. == 생애 == 부친이 유학에 박식한 유학자라 젊어서 아버지의 업을 계승해 경전을 익혀 효렴으로 천거되었다가 제남군 동평현의 현령이 되어 어진 정사를 베풀면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관직을 버렸다. 백성들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길을 차지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으며, 가벼운 차림으로 변장해 도망갔다. 이후 예장태수, 회계태수 등으로 부임해 회계 경 내의 산 속 백성들은 매우 근신하면서 순박해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희도록 저잣거리를 가지 못했는데, 관리들이 경제 사정에 희박한 백성들을 속이고 재산을 챙기자 유총은 번잡하고 가혹한 법령을 간결하게 하면서 단속해 관리들이 중간에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게 해 예장과 회계를 교화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유총이 장작대장으로 임명되면서 낙양으로 떠나게 될 때 산음현의 5, 6명의 노인들이 약아산 속에서 찾아와 100전을 선물로 주면서 배웅하자 유총은 노인에게 한 닢씩 받아 간직했다. 종정, 대홍려 등이 되었다가 [[161년]] 9월에는 황경을 대신해 사도가 되었는데, 짙은 안개가 나타나는 이변이 일어나 파면되어 장작대장이 되었다가 다시 종정이 되었다. [[168년]]에는 8월에는 [[사공#s-2.1]], 9월에는 [[사도#s-1]], [[169년]] 6월에는 [[태위]]가 되었지만 11월에 [[일식]]으로 면직되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집에서 병사했다. [[채옹]]은 유총에 대해 바른 것을 지키는 것에 충실하면서 [[문인습]]과 함께 참모로써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각주] [[분류:후한의 사공]][[분류:후한의 태위]][[분류:한나라의 황족]][[분류:169년 사망]][[분류:옌타이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