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전창위(全昌尉)[* 위호는 본관인 전주가 속한 [[전주시|전주]]에서 따왔다.] 유정량(柳廷亮) 1591년 ~ 1663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손자이자, 유열(柳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지 이위(李韠)의 딸이다. 부인은 [[조선]] [[선조(조선)|선조]]와 [[인빈 김씨]]의 막내딸인 [[정휘옹주]]이다. == 생애 == [[1604년]]([[선조(조선)|선조]] 37) 14세 때 선조의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全昌尉)에 봉하여졌다. 1612년([[광해군]] 4) 할아버지 [[유영경]]의 사건으로 일가가 멸족될 때 전라도 고부에 유배되었다. [[1619년]] 장차 역모가 있으리라는 소문이 호남지방에 유포되자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이배되었다. 여러 해 동안의 귀양살이로 토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여 실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즉시 풀려나와 작위가 회복되어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승품되고, 여러차례 승진하여 성록대부(成祿大夫)에 이르러 전창군(全昌君)에 봉하여졌다. [[1646년]]([[인조]] 24)·1651년([[효종(조선)|효종]] 2)·1655년에 각각 사은사(謝恩使)·진향사(進香使)·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났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유정량과 [[정휘옹주]]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인 유심(柳淰)은 아버지를 따라 함께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인조 반정으로 한양으로 돌아왔다. [[1627년]]([[인조]] 5년) 음보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훗날 예조참판과 도승지 등을 지냈다. [[1667년]]([[현종(조선)|현종]] 8년) 향년 60세를 일기로 죽었다. 차남은 군수를 지낸 유흡(柳潝)이며, 장녀는 이중규(李重揆)의 처이고 차녀는 정화제(鄭華齊)의 처이다. === 말년 === [[1663년]]([[현종(조선)|현종]] 4년)에 사망했다. [[분류:1591년 출생]][[분류:1663년 사망]][[분류:조선의 부마]][[분류:전주 류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