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원나라의 인물]][[분류:송나라/인물]][[분류:1212년 출생]][[분류:1275년 사망]] [include(틀:원사)] [목차] == 개요 == 劉整 (1212 ~ 1275) 자는 무중(武仲), 등주 양성[* 오늘날의 [[허난성]] 덩저우 시] 출신으로 [[송말원초]]의 장수이자 [[원나라]] 수군의 창시자. [[금나라]] 말기 [[남송]]으로 귀순하여 남송의 명신 [[조방(남송)|조방]] 휘하에 속하였고, 이후에는 명장 [[맹공]]의 수하로 활약했다. 이후 1261년 [[여문덕]]으로부터 무시 및 모함을 받아 [[몽골 제국|몽골]]에 투항하고, [[쿠빌라이 칸]]에게 '''"[[양양 공방전|남송을 멸망시키려면 양양을 선취하자]]"'''는 핵심 전략을 내세웠으며, 관직은 표기위장군, 행중서좌승에 이르렀고, 용호위장군, 중서우승으로 관직을 마쳤으며 [[몽골-남송 전쟁|남송 공략]] 와중에 분사한다. 시호는 '''무민'''. == 생애 == === 남송에 투항 === 그는 본래 [[금나라]] 출신의 한인 출신으로, 이후 남송에 투항하여 [[조방(남송)|조방]]의 밑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침착하고 의연하며 지략이 있고, 말을 잘 탔다고 한다. 조방은 죽기 전 아들 [[조규(남송)|조규]]에게 유정을 경계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조규는 듣지 않았다. 그는 이후 [[남송]]의 명장 [[맹공]]의 밑에서 금나라의 신양(信陽)을 공격했고, 그는 선봉으로 용맹한 12명을 이끌고 도참을 넘어 성을 올라 함락시켰다. 맹공은 크게 놀라워하여, 오대 후당 시기 명장 이존효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존효]]가 18기로 낙양을 함락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정이 통솔하는 군이 더 적어 신양을 취하였다고 해서 '''새존효'''라고 불렀다. === 원에 투항하다 === 보우 2년(1254년) [[이증백]]을 따라 촉에 입성해 장수로 선발돼 전공을 쌓았다. 경정 원년(1261년) 4월, 노주지부 겸 동천로안무부사로 승진하였다. 본래 북방 사람인 유정은 무공으로 승진을 했는데, 남쪽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 밑에서 나와 여문덕[* 남송의 명장이었으나 가사도에게 결탁했고 가사도는 변방의 장수들을 배척했다.]의 질시를 받았고, 유정이 계책을 내도 [[여문덕]]에게 이를 부정당하고, 공로가 있으면 여문덕이 숨기는 등 여문덕에게 무시당하였고, 여문덕은 유정과 갈등하던 유흥을 사천제치사에 앉혀 유정을 견제하게 했다. 여문덕은 유흥과 결탁하여 유정을 박해한다고 무고하려 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놀란 가슴을 졸이며 임안에 사람을 보내 조정에 상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상사벽과 조세웅[* 조세웅은 부릉에서 다리를 끊고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이 [[가사도]]에 의해 죽는 것을 보고는[* 가사도가 실행한 타산법으로 인해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받았다.] 부득이하게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하게 된다. 원 중통 2년(1261년) 6월, 유정은 몽골에 의해 기로행성(氣路行省) 겸 선무사(善務使)로 임명되었다. 이를 들은 송이종은 발끈하여 유흥에게 유정을 토벌하도록 명했고, 유정은 자신의 재산을 병졸들에게 나누어줘 10여 회 격전 끝에 유흥을 물리쳤다. 또한 그는 병사를 주둔시키고 후하게 축적하는 투송대계를 제시했다.[* 유정의 투항은 몽골 제국이 수군을 육성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군 전력이 달리는 몽골 제국이었는데, 유정이 그가 이끌던 수군과 노주를 바치니, 몽골 제국은 수군 육성에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되었다. 비록 노주는 여문덕이 이듬해 탈환했지만 여문덕이 유정을 무시한 것은 남송에 있어 치명적이었다.] 중통 3년(1262년)에 순례에 들어가 쿠빌라이를 만나 성도로·동천로에 머물렀으나 여전히 도원수를 겸하고 있던 중서성(中書省)의 동료가 유정의 공로를 질투하여 모함하려 하자 두려운 나머지 동천 분수를 청하였다. 7월에는 동천도원수로 자리를 옮겼다. 중통 4년(1263년) 5월 송의 [[고달(남송)|고달]][* 송의 명장 중 하나이나 나중에 원에 투항한다.]이 온건(溫溫)으로 성도에 접근하자 유정이 명을 받고 달려들었고, 송군은 효지(孝至)가 있다는 말을 듣고 둔해 동천을 공격하려다 패했다. 지원(至元) 3년(1266년) 6월, 소무대장군(昭武大將軍), 남경로(南京路) 선무사(宣務使)로 옮긴다. 지원(至元) 4년(1267년) 11월, 입조하여 남송(南宋)을 멸망시키려면 반드시 양양을 점령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 양양 전투 === 지원(至元) 5년(1268년) 7월, 상장군(上將軍), 도원수(都元首)가 되었다. 9월, 도원수 아술과 함께 제군을 독촉하여 양양을 포위 공격하고,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연강 제군을 습격하여 송의 군민 8만을 사로잡는다. 지원 6년(1269년) 6월, 도통 당영견[* 이후 전황이 불리해진 양양에서 여문환에게 항복을 권하는 그 당영견 맞다.]을 사로잡고, 1270년까지 5천 척을 건조하고 수군 7만 명을 훈련시켰다. 지원(至元) 8년(1271년) 5월, [[범문호]]가 장순(張順)·장귀(張貴)를 이끌고 배를 타고 양양에 의갑(衣甲)을 보내자, 그 틈을 타 송군을 요격하여 장순을 참살하였다. 9월에 참지하남행중서성사가 되었다. 지정(至正) 9년(1272년) 정월, 한군도원수(漢軍都元首)가 되었다. 수장 여문환은 성에 올라 적을 바라보았고, 유정은 말초대에 뛰어들어 [[여문환]]의 복노에 명중하였다. 3월에 번성 외곽을 무너뜨리고, 2천 급을 참수하고, 비장을 16세까지 사로잡는다. 9월, 성곽에서 원조를 구하는 장귀는 결국 죽었다. 11월에 수군 4만 호를 통솔하였다. 경호제치사[* 양양 지역의 방어를 통솔하는 사령관 직책이다.] [[이정지]]는 유정을 이간질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유정은 바얀에게 양양을 취하려면 번성을 먼저 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정정 10년(1273년) 정월, 마침내 번성을 부수고 도살하였다. 여문환은 고립무원이 되어 성을 바쳐 투항하였다. 이후 남송의 대세는 기울었다. === 울분이 치밀어 죽다 === 유정은 수군을 이끌고 승승장구하여 장강 일선을 장악하고 회서추밀원사로 바뀌어 정양에 머물 것을 건의하였다. 지정 11년(1274년)에는 표기위장군, 행중서좌승(行中書左僧)으로 올라 [[하귀]]가 이끄는 수군을 대인주(大人洲)에서 대패시켰다. 지정 12년(1275년) 정월, 유정은 군사를 이끌고 회남으로 출격하여 중로 주력의 공격을 동익으로부터 엄호하였다. 유정은 승승장구하며 중앙의 전선과 격돌하려다 백안의 벽에 막혀 실패했다. 나중에 [[바린 바얀|바얀]]이 강을 건너 악주에 들어왔다는 승전보를 듣고, 그날 밤 안휘 무위성 아래에서 분사했다. == 기타 == 유정이 금나라에서 남송으로 투항하였을 때, [[조방(남송)|조방]]은 유정을 경계했다. >유정은 재기가 있으니, 너희 대에 쓸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환이 될 것이다. 후대의 사학자들은 송원전쟁 후기의 핵심 결정자는 바얀이 아니라 항장 유정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송사 연구 전문가인 왕증유는 유정이 [[몽송전쟁]]의 양상을 변화시킨 핵심 인물이라고 하였다. >후기 [[몽송전쟁]]의 핵심 결정인물은 [[바린 바얀|바얀]]이 아니라 유정이다. 바로 유정이 원나라로 하여금 중대한 전략을 조정하여 강남을 공략하였으며, 150여 년간 유지해온 남송도 결국 원나라의 전략변화로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