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시평효경왕(始平孝敬王)[br]{{{+1 劉子鸞 | 유자란}}}''' || || '''시호''' ||효경(孝敬) || || '''작위''' ||양양군왕(襄陽郡王) → 신안군왕(新安郡王) → 시평군왕(始平郡王) || || '''성''' ||유(劉) || || '''이름''' ||자란(子鸞) || || '''자''' ||효우(孝羽) || || '''부모''' ||부황 [[효무제(유송)|효무제]][br]모친 [[숙의 은씨]](淑儀殷氏) || || '''생몰''' ||456년 ~465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남조)|유송]]의 황족으로 자는 효우(孝羽). [[효무제(유송)|효무제]] 유준의 8남이었다.. == 생애 == 유자란은 456년 [[효무제(유송)|효무제]] 유준과 [[숙의 은씨]](淑儀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460년, 양양군왕(襄陽郡王)에 봉해지고 식읍 2,000호를 받았으며, 동중랑장(東中郞將), 오군(吳郡) 태수로 제수되었다. 같은 해 신안군왕(新安郡王)으로 다시 봉해졌다. 461년, 북중랑장(北中郞將), 남서주(南徐州) 자사로 제수되고 남낭야(南琅邪) 태수를 겸임하였다. 유자란의 어머니 숙의 은씨가 효무제로부터 두터운 총애를 받아서 유자란도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또한 효무제로부터 총애를 관리들은 유자란의 부나 봉국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유자란이 남서주로 부임할 때 오군을 분할하여 남서주 관할에 넣기도 했다. 463년, 숙의 은씨가 죽고 장례를 치른 뒤 유자란은 자사의 신분으로 사도(司徒)를 겸임하였다. 464년, 무군장군(撫軍將軍), 사도(司徒)가 되었고 도독남서제군사(都督南徐州諸軍事)가 더해졌으며, 중서령(中書令)이 더해졌다. 같은 해 효무제가 붕어하고 효무제의 태자인 유자업이 즉위하였다. 유자업이 즉위한 뒤 유자란은 중서령과 사도에서 해임되고 지절(持節)이 더해졌다. 유자란은 효무제의 총애를 듬뿍 받으면서 자란 반면 유자업은 효무제의 실책을 많이 받았다. 유자업은 자신보다 더 총애를 받는 유자란을 시기한 나머지 상술한 것처럼 자신이 제위에 오른 뒤 유자란을 중서령, 사도에서 해임하였으며, 나중에는 유자란을 폐서인하고 사사시켰다. 유자란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願身不復生王家. >다음 생에는 제왕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말은 나중에 소도성에게 선양을 하고 물러난 마지막 황제 [[순제(유송)|순제]]가 한 말과도 비슷했다.] 유자란이 사사됨과 동시에 숙의 은씨에게서 태어난 유자사와 효무제의 딸도 유자업에게 살해당했다. 유자업이 살해당하고 상동왕(湘東王) 유욱이 즉위한 뒤 유자란은 사지절, 시중(侍中), 도독남서연2주제군사(都督南徐兗二州諸軍事), 사도, 남서주 자사로 추증되었다. 유자란이 죽은 뒤 건평왕(建平王) [[유경소]]의 아들 유연년(劉延年)을 신안군왕으로 봉했다가 나중에 시평군왕(始平郡王)으로 봉했다. 469년 유연년이 죽은 뒤, 470년 장사왕(長沙王) 유찬의 아들 유연지(劉延之)를 시평왕으로 봉했다. 시평국은 479년 유송이 멸망한 뒤 단절되었고 유연지도 이때 죽었다. [[분류:송(남조)/황족]][[분류:456년 출생]][[분류:465년 사망]][[분류:팽성 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