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촉한의 황자, rd1=유요(촉한), other2=전조의 황제, rd2=유요(전조))] [include(틀:오서)] 劉繇 157~198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삼국지 오서 유요전과 후한서 허소전에 따르면 정례(正禮). 정체(正體)라고도 하는데 비슷해서 혼동하거나 혼용하는 듯. 황족 가문으로 [[전한]] 한고조의 장남 제왕 유비(劉肥)의 자손이자 연주 자사 [[유대(삼국지)#s-1|유대]]의 동생, [[유기(손오)|유기]]의 아버지. 청주 동래군 모평현 사람. == 생애 == 유요가 19세일 때 종부인 유위가 [[도적#s-1]]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었는데, 유요가 도적들에게서 유위를 구해 명성을 얻었다. 이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낭중이 되었으며, 하읍현의 장으로 임명됐으나 군수의 청탁을 받자 관직을 버렸다. 그러나 청주에서 불러들여 제남군위로 삼았는데, 제남상이 중상시의 아들로 탐욕스러워 뇌물로 자기 배를 채우기에 상주해 파면시켰다. 일찍이 형 유대를 무재[* 원래는 수재지만 후한 [[광무제]]의 이름을 [[피휘]]해서 무재라고 불렀다.]로 천거한 도구흥에게 무재로 천거되었다가 사공연으로 초빙되고 시어사를 제수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그가 회포에서 난을 피하고 있을 때 조정으로부터 양주자사로 임명한다는 조서가 내려왔는데, [[원술]]이 이미 전임 양주자사 [[진온]]이 죽은 후 스스로 양주자사를 임명하고 양주의 치소가 있는 수춘 등 회남 일대를 점거했기에 이를 두려워해서 유요는 감히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요가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려고 하자 [[오경]]과 [[손분]]이 그를 영접해 유요를 곡아에 두었으며, 원술은 칭제를 기도해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는 등 양주의 여러 군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유요는 번능과 장영을 파견해 원술에게 대항토록 하고 오경과 손분이 원술로부터 관직을 받은 것을 힐책해 쫓아냈으며, 원술은 양주자사를 새로 임명하고 손분과 오경에게 병사를 주어 번능, 우미, 장영을 공격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유요가 원술로부터 항거한 것으로 인해 조정은 양주목, 진문장군을 더했고 수만의 병졸을 주었다.[* 아직까지는 한나라 조정의 권위나 여력은 남아있던터라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받고 나름 원술을 상대로 군공도 있는 유요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요와 비슷하게 조정에서 임명됐으나 지방 군벌들의 발호로 부임지에 가지 못한 한나라 신하들이 유요의 권위에 기대 지방의 군벌들을 토벌하는데 힘을 보탰다. 주호나 설례 등이다.] 194년에 [[손책]]이 손분과 오경을 도우러 와 장강을 건너 장영과 번능 등을 격파했으며, 195년에는 우저를 빼앗기자 유요에게 의지하면서 말릉성을 지키고 있던 착융과 설례도 손책에게 격파당했다가 [[설례]], [[번능]], [[우미]]가 반격해 우저를 되찾았다가 도로 빼앗겼다. 착융이 성을 견고히 지키자 손책은 방향을 돌려 유요를 공격하자 유요는 단도로 달아났다가 예장을 지키고자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팽택에 머물렀다. 처음 손책의 군사와 맞닥뜨리자 마침 [[태사자]]가 유요와 동향 사람인 연고로 곡아로 내려와서 유요에게 왔는데, 태사자를 장군감으로 권하는 말이 있었지만 유요는 허소의 비웃음을 사지 않고자 태사자를 임용하지 않았다. 당초 유요는 회계로 달아나려 했으나, 허소가 손책이 회계를 공격할 것이므로 반대하고 예장으로 가면 [[조조]], [[유표]]와 연락하면서 지킬 수 있다고 권해 예장으로 경로를 바꿨다. 당시 예장에서는 유표가 임명한 태수 제갈현[* [[제갈량]]의 숙부다.]과 조정이 임명한 태수 [[주호#s-2]]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유요는 주호를 후원하여 착융을 파견해 제갈현을 치게 했다. 허소는 착융은 명분을 돌아볼 사람이 아니라서 주호는 사람을 믿으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 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과연 착융은 주호를 죽이고 예장을 점거하자 유요는 착융을 쳐서 한 번은 졌지만 마침내 착융을 무찔렀다. 이후 병이 들어 4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손책은 병사한 유요의 시신을 거두고 그의 식솔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태사자 외에도 복양일[* [[복양흥]]의 부친이다.]·등탐[* [[등윤]]의 큰아버지다.]·[[시의]] 등의 중원 선비들이 유요에게 의탁했었고, 유요가 망하면서 손책을 섬겨 이후 오나라의 중신이 됐다. 유대와 유요 형제는 한나라 제효왕(齊孝王)의 작은 아들 모평후의 가계에 속한다. 아버지는 유방(劉方)이고 백부 [[유총#s-2]]은 태위였다. 자식으로는 [[유기(손오)|유기]], 유삭, 유상이 있다. 이중 큰 아들 유기는 [[손권]]을 섬겨 수려한 용모로 총애를 받아 나중에 광록훈의 직위에까지 올랐으며, 손권의 아들 [[손패]]는 아내로 유기의 딸을 맞이했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유요/기타 창작물)]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황족]][[분류:157년 출생]][[분류:198년 사망]][[분류:옌타이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유요, d=2023-01-17 00:3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