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한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11 0%, #a11 30%, #a11 70%, #a11);" {{{#ece5b6 '''유영 관련 둘러보기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한 황태자)] ---- [include(틀:역대 전한~후한 과도기 황제)] ---- }}} || ---- ||<-2> {{{#ece5b6 '''전한 제15대 황제'''[br]{{{+1 '''定安公 | 정안공'''}}}}}}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208.poco.cn/5460302020100918094454051.jpg|width=100%]]}}} || ||<|2> '''{{{#fff 출생}}}''' ||5년 || ||[[전한]][br](現 [[중화인민공화국]]) || ||<|2> '''{{{#fff 사망}}}''' ||25년 (향년 20세)|| ||[[현한]] 안릉[br](現 감숙성 진원현) || ||<|4> '''{{{#fff 재위}}}''' ||'''{{{#ece5b6 전한의 태자}}}''' || ||[[6년]] [[4월 15일]][*G 나무위키의 규정에 따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값이며, 당시의 달력으로는 거섭 원년 3월 1일(기축일)이었다.] ~ [[8년]] || ||'''{{{#ece5b6 전한의 황제}}}''' || ||[[6년]] [[4월 15일]][*G] ~ [[9년]] [[1월 8일]][* 나무위키의 규정에 따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값이며, 당시의 달력으로는 초시 원년 11월 25일(무진일)이었다.] (999일) || || '''[[성씨|{{{#fff 성}}}]]''' ||유(劉) || || '''[[휘|{{{#fff 휘}}}]]''' ||영(嬰) || || '''{{{#fff 부모}}}''' ||부친 광척후 유현(劉顯) || || '''[[묘호|{{{#fff 묘호}}}]]''' ||없음 || || '''[[시호|{{{#fff 시호}}}]]''' ||없음 || || '''[[작위|{{{#fff 작위}}}]]''' ||정안공(定安公) || || '''[[연호|{{{#fff 연호}}}]]''' ||거섭(居攝, 6년 ~ 8년)[br]초시(初始, 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전한]]의 제15대 황제. 2세의 갓난 아기때 외척 출신의 권신 [[왕망]]의 추대로 즉위했다. == 생애 == 제10대 [[선제(전한)|선제]]의 [[현손]]자였다. 좀 더 살펴보면 선제의 3남 초효왕 유오의 증손, 유오의 차남 광척후 유훈의 손자, 유훈의 아들 광척후 유현(劉顯)의 아들이었다. 제12대 [[성제(전한)|성제]], 제13대 [[애제(전한)|애제]], 제14대 [[평제]]가 모두 후계자없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제11대 [[원제(전한)|원제]]의 후대는 끊겼기 때문에, 선제의 후손을 후계자로 세웠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왕망]]이 그를 평제의 황태자로 옹립했고, 평제 독살 이후 제위를 계승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리다는 이유로 왕망이 즉위식을 거행시켜 주지 않았으므로 황제라고 할 수는 없다. 왕망은 아기 유영을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 가황제, 섭황제라 칭했다가, 2년 만인 초시 원년(8년) 11월 무진일,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찬탈하고 [[신나라]]를 세웠다. 왕망은 사촌 왕순을 시켜 태황태후이자 자신의 고모였던 [[효원황후 왕씨|왕정군]]으로부터 '''[[전국옥새]]'''를 받아오게 했는데 태황태후 왕씨는 화가 난 나머지 옥새를 던지는 바람에 전국옥새의 모퉁이가 깨졌다. 어쨌든 왕순으로부터 전국옥새를 받은 왕망은 희색이 만면하여 즉위식을 준비했다. 제위를 양도받는 의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왕망은 어린 유자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옛날 [[주공단|주공]](周公)께서 섭위하셨을 때는 끝내 복벽하여 [[성왕(주)|성왕(成王)]]에게 제위를 돌려 드렸는데 지금 나는 천제의 지엄한 명령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구나..." 라고 탄식하는 체했다. --이중인격자의 엄청난 명연기였다.-- 유자영은 이때 나이가 4세였는데 '''안한공'''에 봉작됐다가 다시 '''정안공'''(定安公)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왕망은 유자영을 유폐시켜 버렸다. 유자영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항상 어두운 독방에서 감시당한 채 생활했는데, 이때 유모와도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라서도 여섯 가지 동물(六畜)[* [[소]], [[말(동물)|말]], [[양(동물)|양]], [[돼지]], [[개]], [[닭]]]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15년 후였던 서기 23년, 한나라의 부활을 명분으로 거병한 먼 친족 [[경시제]] 유현(劉玄)이 상안(장안)을 쳐서 왕망을 죽이고 신나라를 멸망시켰다. 유자영은 이때 나이가 19세였는데, 장안 현지에 있었던 지사들에 의해 유폐 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전한의 방계 자손인 유현이 장안을 점령한 이후, [[꼭두각시]]긴 했어도 한때 황제였고, 자기보다 정통성이 더 높았던 유자영의 존재는 경시제 유현 정권의 불안요소였다. 결국 유현의 실정에 실망한 방망(方望) 등이 유자영 복위운동을 벌였고, 유자영은 방망 등과 함께 경시제 유현이 보낸 승상 이송에게 살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짓을 한 경시제 유현도 얼마 못가 장안에 입성한 [[적미군]]에 의해 유자영과 똑같은 운명을 맞고 말았다.] 유자영은 전한 제10대 선제의 [[현손]]자였지만 경시제 유현은 제6대 [[경제(전한)|경제]]의 후손이었므로 사실상 남남이었다. 유자영의 황후는 [[왕망]]의 손녀이자 왕망의 장남 왕우의 차녀였던 왕씨였는데, 그녀도 유자영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유자영을 마지막으로 전한 선제의 자손도 끊어졌고, 전한 제7대 무제의 다른 자손들도 이 때 대부분 살육되어 이후로는 역사에 거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분류:한나라의 황제]][[분류:망국의 군주]][[분류:5년 출생]][[분류:25년 사망]][[분류:살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