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3대 국회의원/경상남도)] [include(틀:제4대 국회의원/경상남도)] [[파일:external/rokps.or.kr/535.jpg|width=150]] 兪鳳淳 1919년 1월 7일 ~ 1980년 9월 13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1919년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http://blog.daum.net/qhwnd128/16907630|#]]에서 태어났다. 합천공립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 수료하였다. [[8.15 광복]] 후 거창군 거창[[읍(행정구역)|읍]]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노기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노기용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자유당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1958년 2월 대한국민항공사(현 [[대한항공]]) 소속 KNA여객기인 창랑호에 탑승하던 중 북한에 납치되는 [[창랑호 납북 사건]]을 겪다가 풀려났다. 같은 해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하였으나 이번에는 [[민주당(1955년)|민주당]] [[이상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게다가 [[3.15 부정선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1961년 3월 공민권이 제한되어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 같은 해 일어난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부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엮여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하였다. 선거 직후인 1963년 말에야 해금되었다. 1966년 [[윤보선]] 등이 [[민중당(1965년)|민중당]]을 탈당하여 신한당을 창당하자 [[신한당]]에 몸담았다. 1967년 초 신한당이 민중당과 재통합하여 신민당이 되자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속하였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자유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5번)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오유방]] 후보와 친야 무소속 [[김재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분류:1919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제4대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분류:와세다대학 출신]][[분류:합천군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