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2> '''{{{#fff 유송의 대신[br]진안양후(晉安襄侯)[br]{{{+1 劉道産 | 유도산}}}}}}''' || || '''{{{#fff 작호}}}''' ||<(> 진안현후(晉安縣侯) || || '''{{{#fff 시호}}}''' ||<(> 양(襄) || || '''{{{#fff 성}}}''' ||<(> 유(劉) || || '''{{{#fff 이름}}}''' ||<(> 도산(道産) || || '''{{{#fff 부친}}}''' ||<(> 유간지(劉簡之) || || '''{{{#fff 출생}}}''' ||<(> ? ~ 442년 || || '''{{{#fff 출신}}}''' ||<(> 팽성군(彭城郡) 여현(呂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육조)|유송]]의 인물. == 생애 == 팽성군(彭城郡) 여현(呂縣) 출신으로 태위(太尉) 자의참군(諮議參軍) 유간지(劉簡之)의 아들이었다. 유도산은 처음에 [[동진]]에서 보국장군(輔國將軍)이 되었고 무석현령(無錫縣令)을 맡으면서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유도산은 유유의 밑에서 중병행참군(中軍行參軍)으로 있었다가 다시 유도련(劉道憐)의 표기창군(驃騎參軍)이 되었으며 부친의 작위인 진안현(晉安縣) 오등후(五等侯)를 습봉하였다. 417년, 광주(廣州)에서 서도기(徐道期)라는 인물이 자사가 죽은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자, 유도련은 유도산에게 진무장군(振武將軍)을 더하고 서도기를 토벌하도록 명하였으나, 유겸지(劉謙之)가 이미 서도기의 반란을 평정하여 유도산은 돌아온다. 이후 유유는 420년에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동진)|공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송(육조)|유송]]을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유송)|무제]]였다. 유도산은 422년에 유송에서 영원장군(寧遠將軍), 파서군과 재동군의 태수가 되었다. 이때 황공생(黃公生), 임숙지(任肅之), 장석지(張石之) 등을 비롯한 [[초종]]의 잔당이 후람(侯攬), 나오(羅奧)와 함께 백수저(白水氐)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유도산은 이들의 반란 모의를 잡아내었다. 이후 유도산은 돌아와서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의 표기중병참군(驃騎中兵參軍)이 되었다. 426년에는 독양남진2주제군사(督梁南秦二州諸軍事), 영원장군, 서융교위(西戎校尉), 양남진2주(梁南秦二州) 자사가 되었다. 429년에는 조정에 표문을 올려 농서군(隴西郡)과 송강군(宋康郡)을 설치하도록 요청하였으며, 또한 농서군과 송강군의 통치를 맡았다. 430년에는 후군장군(後軍將軍)으로 임명되었고, 431년에는 경릉왕(竟陵王) 유의선(劉義宣)의 좌장군자의참군(左將軍諮議參軍)으로 옮겼으며 또한 지절(持節), 독옹양남진3주형주남양경릉순양양양신야수6군제군사(督雍梁南秦三州荊州之南陽竟陵順陽襄陽新野隨六郡諸軍事), 영원장군, 영만교위(寧蠻校尉), 옹주 자사, 양양 태수를 맡았다. 436년에 보국장군이 되었다. 유도산은 442년에 사망하여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추증되고 양후(襄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442년 사망]][[분류:팽성 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