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태조 왕건/등장인물]][[분류:한국 드라마 캐릭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배역의 실존인물, rd1=유긍달)] [include(틀:태조 왕건)] [목차] == 개요 == [[태조(고려)|태조]]의 장인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아버지인 [[유긍달]]을 바탕으로 한 캐릭터다. 배우는 [[민욱]].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선 배우 허현호가 맡았다. 34회 때 [[왕건(태조 왕건)|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상주]]의 [[아자개(태조 왕건)|아자개]] 영토를 침범할 때 [[충주]]의 호족으로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왕건에게 딸인 수인[* [[신명순성왕후]]가 왕후가 되기 전 극 중에서 창작한 이름이다.]을 시집 보내 왕건의 장인이 되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 황제의 장인이 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나 태자 책봉 문제를 놓고 권력 다툼을 벌인 끝에 140회를 끝으로 향리로 돌아가는 설정으로 하차한다.[* 이 무렵부터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이 촬영 중이었고 민욱 역시 [[제국의 아침]] 출연 결정이 확정되어 하차한 것이다.] == 극중 행적 == [[궁예(태조 왕건)|궁예]]가 [[양길(태조 왕건)|양길]] 세력을 평정하고 난 이후 [[후백제]]와 경계를 이루기 위해 [[왕건(태조 왕건)|왕건]]으로 하여금 남진을 명하는데 그 때 [[아자개(태조 왕건)|아자개]]의 영토인 [[상주]]로 쳐들어가게 된다. 상주로 가기 위해선 [[조령]]과 [[죽령]]을 넘어야 하는데 그 앞에 있는 경유지인 [[충주]]의 호족으로서 처음 등장한다. 그 때를 계기로 유긍달은 왕건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왕건을 눈여겨 본 그는 왕건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간파하고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후백제의 공격으로 인해 조령과 죽령 지역의 거점을 잃자 궁예는 곧바로 왕건을 파견하는데 그 때 유긍달은 자기 휘하의 장수 금식을 내어주며 왕건의 상주 진출을 적극 지원한다. 상주 일대 지리에 통달한 금식을 얻은 왕건은 곧바로 상주 사화진 일대를 수복함과 동시에 대단한 친화력의 소유자 [[박술희(태조 왕건)|박술희]]를 이용해 아자개가 후백제의 편을 들지 못하도록 막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상주 일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자 왕건을 평소 눈여겨봤던 유긍달은 왕건에게 자신의 딸 수인을 시집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왕건은 이미 [[유천궁]]의 딸 부용, [[오다련]]의 딸 도영과 결혼하여 부인이 둘이나 있던 상황이어서 곤란해한다. 그러나 유긍달은 계속해서 자신을 장인으로 받아줄 것을 강권했고 결국 설득을 이기지 못한 왕건은 유긍달의 청을 받아들여 수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이 수인과의 혼인식 자리에 왕건으로부터 상보 대접을 받던 [[아자개(태조 왕건)|아자개]] 역시 하객으로 초청되었다. 유긍달은 눈치껏 아자개를 어르신으로 존대하며 환심을 산다.] 이 무렵에 [[석총(태조 왕건)|석총]]이 [[허월]]과 함께 충주에 들르게 되었는데 이 때 석총은 미륵의 상징인 간자를 왕건에게 건네준다. 저 간자 전달 사건이 중요한데 유긍달은 이미 집안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입조심을 해두었다. 그런데 이 비밀이 어디서 새어나간 것인지 [[아지태(태조 왕건)|아지태]]가 102회에서 처형당하기 전에 [[물귀신 작전]]으로 왕건을 물고 늘어지며 당시 충주에 석총이 들렀고 그 때 무슨 말이 오갔을 것이라며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다행히 아지태가 자세한 내막은 몰랐기에 무사히 넘어가는 듯했지만 석총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궁예는 아지태가 죽은 후에도 그 말을 곱씹고 있었으며 결국 왕건을 의심하게 된다. 아지태가 처형당한 직후 아지태의 수하였던 순군부 낭장 [[임춘길]]의 집에 후백제에서 온 간첩인 승려 도우가 찾아오게 된다. 도우는 임춘길을 꼬드겨 왕건을 궁지로 내몰게 유도했는데 이 때 도우가 유긍달의 집에 찾아가 그 집의 집사장을 꼬드겨 석총의 방문 사실을 추궁했다. 이에 집사장이 순진하게 석총이 미륵의 간자를 건네준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사위 걱정이 된 유긍달은 급히 유천궁의 집을 방문하여 사위 걱정에 울먹거리지만 유천궁 역시 그 때 즘엔 고령으로 조정에서 은퇴한지 꽤 오래된 상황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왕건은 무사했고 이후 역성 혁명이 일어나 태봉국이 무너지고 고려가 들어선다. 고려가 들어선 직후에 유긍달도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 무렵부터 그는 무시무시한 권력욕을 드러내게 된다. [[장화왕후]]의 아들인 왕무와 자신의 딸인 [[신명순성왕후]]가 낳은 아들인 왕요, 왕소 형제가 태자 후보로 거론되었는데 이 태자 자리를 놓고 장화왕후의 아버지인 오다련과 다투게 된다. 이로 인해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결국 [[최응(태조 왕건)|최응]]의 조언을 받은 왕건이 장인들을 모두 조정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유긍달은 충주의 향리로 임명되었고 140회에서 태자 책봉식을 관람하는 걸 끝으로 하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