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삼국시대(중국)]][[분류:중국사/교체기]] [목차] == 개요 == 魏末晉初. 중국 삼국시대의 [[위(삼국시대)|위나라]](조위)에서 [[서진|진나라]](서진)로 교체된 시기이다. '''위진교체기'''(魏晉交替期)라고도 한다. 이로 인해 삼국의 통일은 조씨의 조위, 유씨의 촉한, 손씨의 동오도 아닌 사마씨의 서진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 전개 == === 배경 === 220년 위왕 [[조조]]가 승하하자 뒤를 이은 [[조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 유협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했다. 6년 뒤 고조 문황제 조비가 붕어하고 226년 아들 [[조예]]가 제위를 이어받았으나 열조 명황제 조예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방]]을 데려와 양자로 삼았다. 조방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조예는 [[사마의]]와 조진의 아들 조상에게 후계자인 조방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고, 239년 조예가 붕어하자 조방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전폐제 조방의 출신과 혈통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가뜩이나 불안정한 조위의 정통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조상은 사마의와 황제 조방을 배제한 채 전횡을 일삼으면서 중앙 정계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 [[고평릉 사변]] === [[사마의]]는 249년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과 그 일파를 제거하고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사마의가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 [[사마사]]와 차남 [[사마소]]가 정권을 잡았다. === [[조방]]의 친위 쿠데타 시도 === 조방은 사마의가 죽자 254년에 친위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발각되어 폐위당했고, 조방의 사촌 동생인 조모가 제위에 올랐다. === [[조모(삼국지)|조모]]의 친위 쿠데타 실패 === 후폐제 조모가 제위에 오른 뒤 사마사가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보고 260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오히려 시해당하고 말았고, 조모의 먼 친척인 [[조환]]이 다음 황제가 되었다. === [[촉한멸망전]] === 전무후무한 대낮의 황제 시해로 정치적 타격을 받은 사마소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260년부터 촉한 정벌 준비를 시작했는데, 263년 10월 옛 진나라(晉)의 영토를 하사받아 진공의 자리에 올랐고 동년 11월에는 후주 유선의 촉한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촉한 정벌의 대공으로 264년 사마소는 진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265년 9월에 승하했다. === 원제 [[조환]]의 선양과 [[서진]]의 건국 === 265년 9월 사마소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마염]]은 동년 12월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 번외: [[오멸망전]] === 한편 264년 [[손호]]가 즉위한 후 각종 폭정을 일삼아 동오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서진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79년 동오를 공격하여 280년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성공했다. == 영향 == === 중국 ===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래 삼국으로 갈라져 있었던 중국을 서진이 재통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서진 정권은 황제 시해와 선양을 가장한 찬탈 등 정통성 문제 등으로 굉장히 불안정했고, 여기에 막장 황제들의 즉위와 [[팔왕의 난]]으로 인해 혼란이 수습되지 않고 계속 커지면서 점점 더 쇠약해졌다. 결국 북방민족인 남흉노의 [[유연(전조)|유연]]이 건국한 호한([[전조(오호십육국시대)|전조]])의 대규모 남하로 화북이 점령당했고('''[[영가의 난]]''') 서진의 사마씨 황실은 남쪽으로 도피해 [[동진]]으로 명맥을 이어나가면서 중국 최악의 혼란기인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어 수•당의 천하통일 때까지 중국의 분열기는 더욱 길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서진의 재통일로 인해 중국의 [[천하통일]]사상의 명맥을 이으면서 이후 성립된 북조와 남조의 경쟁을 촉진시켜 수•당의 통일로 이어지게 만든 의의는 있다. === 한반도 === 중국이 통일되어 [[한나라]]와 [[신나라]], [[위(삼국시대)|위나라]] 때처럼 [[고구려]]와 서진 간의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서진이 [[영가의 난|북방민족의 대규모 공격]]으로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고구려와 서진 사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진의 남하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한군현]]이 고립되자 고구려 제15대 [[미천왕]] 고을불은 이를 기회로 보고 [[서안평]]을 점령해 중국과 한사군 사이의 교역로를 끊고, 곧바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공격해 멸망시키면서 중국계 한사군을 한반도에서 모두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고구려의 이런 영토 확장은 훗날 제19대 [[광개토대왕]]과 제20대 [[장수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