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전주 이씨 운천군파]][[분류:1611년 출생]][[분류:1669년 사망]] ---- ||<-3><#94153E> {{{#gold '''조선 성종의 현손'''[br]---조선 원종의 왕자---[br]{{{+1 '''원창군[br] 原昌君'''}}}}}} || ||<-2> '''[[작호|{{{#gold 작호}}}]]''' ||<(> 원창부령(原昌副令) → 원창군(原昌君)[* 작호는 [[강원도]] [[원주시|원주]](原州)에서 유래했다.] || ||||<:>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 '''[[이름|{{{#gold 이름}}}]]''' ||<(> 구(玖) || ||||<:> '''{{{#gold 양부}}}''' ||<(> ---[[정원군|조선 원종]](朝鮮 元宗)--- || ||||<:> '''{{{#gold 양모}}}''' ||<(> ---[[인헌왕후|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 ||||<:> '''{{{#gold 생부}}}''' ||<(> 의신군 || ||||<:> '''{{{#gold 생모}}}''' ||<(> [[원주 원씨]](原州 元氏) || ||||<:> '''{{{#gold 부인}}}''' ||<(> [[청송 심씨]](靑松 沈氏)[*A [[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1172_001%5E%EC%9A%B4%EC%B2%9C%EA%B5%B0%ED%8C%8C%5E%EC%9A%B4%EC%B2%9C%EA%B5%B0%ED%8C%8C|출처: 《선원속보 - 성종대왕자손록 운천군파 권1》, 17면.]]]|| ||||<:> '''{{{#gold 자녀}}}''' ||<(> 1남[* 후술하겠지만 [[양자(가족)|양자]]이다.] 4녀[*A] || ||<|2><:> '''{{{#gold 생몰[br]기간}}}''' ||<:> '''[[음력|{{{#gold 음력}}}]]''' ||[[1611년]] [[9월 18일]] ~ [[1669년]] [[5월 5일]][*A] || ||<:> '''[[태양력|{{{#gold 양력}}}]]''' ||[[1611년]] [[10월 23일]] ~ [[1669년]] [[6월 3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성종(조선)|성종]]의 14남 [[운천군|운천군 이인(雲川君 李𪬦)]]의 증손자이다. [[인조]]에게는 숙부 뻘 [[항렬]]로[* 즉, [[광해군]], [[정원군]]과 같은 항렬.] 9촌 지간이다. 계보 상으로는 다음과 같다. >운천군 이인 - 이천군 이수례(생부는 운천군의 이복형 [[완원군]])[* 완원군의 차남으로, 은천군에게 아들이 없어 이천군 이수례가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한 것이다.] - 의신군 이비 - '''원창군 이구''' == 생애 ==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난 후, [[후금]](훗날 [[청나라|청]])은 [[조선]]과 정묘조약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조선의 왕자를 [[후금]]에 [[인질|볼모]]로 보내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인조]]는 급히 원창부령[* 副令. [[종친부]]의 종 5품 작위이다. 부령은 사실상 이름만 왕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구를 원창군으로 봉해 왕의 동생을 가장하게 하여[* 실제로는 위에 썼듯, 9촌 '''숙부'''이다.] 많은 [[공물]]을 가지고 가 화의와 철군을 요청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02013_004|#]] 후에 이홍망(李弘望) 등과 [[청나라|후금]]에서 두 나라의 우호를 증진시켰다 하며, 돌아올 때는 후금의 [[장수]] 유흥조(劉興祚), [[용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다고 한다. 1631년(인조 9년)에는 [[후금]] [[사신]]이 왔는데도 외방에 있어서 만나지 않아 파직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903012_001|#]] == 여담 == * 원창군과 비슷하게, 왕실 직계와 먼 종친이면서 가까운 왕족으로 둔갑당해 [[청나라]]에 끌려갔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의순공주]]이다. 그는 [[성종(조선)|성종]]의 9남(서7남) [[익양군]]의 현손녀로, [[청나라]]가 당시의 섭정왕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새 친왕비로 조선의 공주를 맞이하고 싶다며 보내달라고 요구했을 때, [[효종(조선)|효종]]의 양녀가 된 후 청나라로 갔다. 그런데 이후의 삶이 너무나도 슬프다. 자세한 내용은 [[의순공주]] 문서 참조. * 한자 이름이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구(1931)|이구]]와 같다. == 가족과 후손 == 어머니는 [[원주 원씨]]로, 1900년([[광무]] 4년)에 펴낸 《선원속보》에는 통제사 원균(綂制使 元均)의 딸이라고 적혀있는데 우리가 아는 그 [[원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1172_001%5E%EC%9A%B4%EC%B2%9C%EA%B5%B0%ED%8C%8C%5E%EC%9A%B4%EC%B2%9C%EA%B5%B0%ED%8C%8C|출처: 《선원속보 - 성종대왕자손록 운천군파 권1》, 12면.]]] 슬하에 딸 4명을 두었다. 그 중 1명만 정실 출생이며 다른 3명은 측실 사이에서 낳았다. 적녀는 홍유무, 서녀들은 각각 성시욱, 심호, 남중성과 혼인했다.[*A]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촌형 인산군 이우(仁山君 李瑀)의 아들 이시원(李時援)을 [[양자(가족)|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이시원은 이반(李磐)과 이여(李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반의 대는 [[고종(대한제국)|고종]] 때까지 독자로 이어졌고[* 이반의 7대손 대에서 아들 2명이 태어났으나 그 중 한 명은 이여의 후손으로 입적했다.] 이여의 후손들이 그나마 번성했다.[*A]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구, version=117, paragraph=2, title2=의순공주, version2=69, paragraph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