袁準 생몰년도 미상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위(삼국시대)|조위]],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효니(孝尼)로 [[원환]]의 넷째 아들. [[예주]] [[진(규성)|진국]] 부락현 사람. == 생애 == 충실한 마음가짐으로 올바르게 행동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밑에 나오는 혜강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지만 원준의 아버지 원환은 216년 연간에 죽었고 혜강은 222년 생으로 아무리 못해도 원준이 최소 5~6세는 혜강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럼에도 혜강의 음악을 배우고자 했던 점에서 이를 알 수가 있다.] 오직 남이 자기보다 뛰어나지 못함을 걱정했다. 세상사에 험난함이 많아 물러나 벼슬을 구하지 않았으며, 재능이 뛰어나고 저서가 10만여 언에 달했다. [[역경]], 주관, [[시경]] 등에 전을 남겼고 오경에 능통해 성인이 남긴 말씀을 빠짐없이 세상에 전했고 [[순작]]은 그를 준재라 평가했다. [[혜강]]에게 광릉산[* [[고금|칠현금]] 연주곡 중 하나며, 혜강이 처음 연주한 곡이었다.]을 배우고자 했지만 혜강이 인색하게 굴어서 알려주지 않았고 26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원준에게 가르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며, [[태시]] 연간 급사중이 되었다. 저서로는 원자가 있고 원자를 통해 [[제갈량]]이 [[제갈량의 북벌|북벌]]을 한 것에 대해 '제갈량(諸葛亮)은 중인(重人)이나 촉병(蜀兵)을 자주 사용하였으니 이는 소국(小國) 약민(弱民)이 오래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으며 [[종회]], [[등애]]가 [[촉한]]을 멸망시킨 것에 대해 '등애가 1만 명으로 강유성의 험지로 들어갈때 종회가 20만 군사로 [[검각]]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만일 [[유선(삼국지)|유선]]이 며칠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세우기가 이와 같이 어렵도다. 국가에 앞에 [[수춘]](壽春)의 [[수춘삼반|역(役,사건,전투)]]이 있고 뒤에 [[촉나라|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고가 비었다. 그러므로 소국(小國)이 염려할 것은 늘 공을 세워 자존(自存)하는 것인 반면에 대국(大國)이 염려할 것은 승리한 뒤에 역량이 고갈되는 것이니 성공(成功)한 뒤야말로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로다.'라는 평가를 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원준, version=53, paragraph=1)] [[분류:조위의 인물]][[분류:서진의 인물]][[분류:진군 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