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혼전, top2=종묘, top3=사당)] {{{+1 原廟}}} [목차] == 개요 == 본래 [[종묘]]와는 구별되는 원묘(原廟)가 궁궐 내에서 운영되었다. 처음에는 혼전으로 운영되다가 원묘로 정착한 것이다. == 역사 == 원묘는 [[전한]] [[혜제(전한)|혜제]] 때 소손통의 건의로 시조 이하 조상을 위하여 처음 건립되었다. 이후 중국의 왕조들도 원묘제를 이어갔다. [[송나라]] [[신종(송)|신종]]이 경령궁(景靈宮)에 원묘를 지었고, 명대에는 제왕의 가묘(家廟)로서 자금성 안에 봉선전(奉先殿)이라는 원묘를 설치하였다. 고려 때에는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궁궐의 북쪽에 원묘로 경령전(景靈殿)을 지었다. 조선의 원묘제는 본래 [[혼전]]으로부터 시작하였다. 1398년 경복궁 내에 [[신의왕후]]의 혼전인 인소전(仁昭殿)을 건립한 뒤 1408년 태조가 사망하자 태조의 신위도 인소전에 함께 봉안되었고, 이 때 전각 이름이 문소전이 되었다. 이어서 [[정종(조선)|정종]]과 [[정안왕후]]의 혼전인 인덕전(仁德殿)이 정종이 살던 인덕궁 내에, [[태종(조선)|태종]]과 [[원경왕후]]의 혼전인 광효전(廣孝殿)이 생겼는데, 당시에는 3년상이 끝난 뒤에도 신어가 계속해서 남아 종묘와는 별도로 운영되며 궁궐 내의 종묘 역할을 하였다. 세종 대에 들어가서야 "한 세대마다 이렇게 혼전이 생기면 나중에 가서는 궁궐이 혼전으로 꽉 차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1432년, 광효전을 문소전으로 합하고 경복궁에 봉성전(奉誠殿)을 건립하여 원묘로서 관리하였다.[* 이 때 인덕전은 봉성전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정종은 정식 임금으로 인정되질 않았서였다.] 봉성전을 지을 때, 종묘처럼 비대해지지 못하도록 5칸으로 지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도록 하였고, 태조의 자리를 고정시키고 남은 자리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4개의 남은 자리는 한 명이 죽어서 봉성전에 들어가면 나머지 한 명의 신위는 치우는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선조가 명종, 인종, 중종, 성종, 태조의 제사를 지내다가 선조가 죽어서 선조의 신위가 들어가면 성종의 신위를 치우고 광해군은 선조, 명종, 인종, 중종, 태조의 제사를 지내는 식이고 신위도 [[소목#s-4]]이라해서 중앙의 태조의 신위를 제외하고 소 2, 4 목 3, 5으로 배치했다.] 봉성전으로 이름을 정하고 한 달 후 봉성전을 문소전(文昭殿)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진왜란까지 약 200여년은 원묘제가 유지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문소전도 함께 불타 원묘제는 중단되고, 위패는 강화도로 모셨으나 재사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땅에 묻고, 신주는 종묘에 있는 것[* 임진왜란 때 몽진하면서 종묘에 있는 신위는 챙겨갔었다.]만 사용하였다. 이렇게 원묘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논란 == 중종 대에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들이 원묘제가 부당하니 폐지할 것을 아뢰었다. --또 조광조야?-- 그러나 원묘제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명종이 죽은 뒤 인종과 명종이 형제 간이라 같은 사당에 나란히 넣기가 굉장히 애매해졌다. 이게 왜 문제냐면, 선조 입장에서는 사대봉사를 지내야 하니, 고조부인 [[의경세자|덕종]]부터, 증조부인 성종, 조부인 중종, 양아버지 명종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중간에 인종이 끼어 있으니 고조부 덕종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세종이 5칸으로 못을 박아 더 넣을 공간은 없고, 그렇다고 인종을 빼자니 먼저 재위하신 분을 빼고 나중에 재위하신 분은 제사를 지내주는 셈이고, 그렇다고 명종을 빼자니 양아버지를 제사에서 빼는 건 도리가 아닌 애매한 상황이었으나, 그냥 덕종을 빼고 삼대봉사를 지내는 걸로 하였다. == 후신 == 이후 [[숙종(조선)|숙종]]때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선원전]]이 건립되었고 [[숙종(조선)|숙종]] 이후의 국왕들의 [[어진]]이 봉안되기 시작했다. 봉안되는 임금이 늘어날수록 건물이 증축되었고 최종적으로 [[고종(조선)|고종]]때에는 [[경운궁]]에 [[덕수궁 선원전|선원전]]을 세운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기존의 6칸이었던 [[경복궁 선원전|경복궁]],[[창덕궁 선원전|창덕궁의 선원전]]도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위해서 7칸으로 증축한뒤 [[칠묘]]제로 운영했다.[* 단 배치는 [[소목#s-4]]제가 아닌 [[종묘]]처럼 제사를 받는 쪽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치 되었다.] == 미디어에서 == 드라마나 영화에서 왕이 어떤 방에 앉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선왕이나 모후의 얼굴을 보면서 푸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조선 전기를 다룬 사극이면 문소전일 테고, 조선 후기를 다룬 사극이면 선원전일 것이다. * KBS 드라마 [[왕과 비]] 87화에서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가 위독하자 세조가 문종의 위패 앞에서 의경세자를 살려달라 빌던 곳, 88화에서 결국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가 다시 와 문종 앞에서 노산군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외치던 곳이 문소전이다. 183화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겠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던 [[인수대비]]가 밤 중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소전으로 가자!"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소전에 봉안된 세조-성종의 위패를 보고 엎드려 절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의 배경이 바로 문소전이다. [[분류: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