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우용택}}}'''[br]'''禹龍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우용택.jpg|width=100%]]}}} || || '''자''' ||재현(在見) || || '''호''' ||대봉(大峰), 육봉(六峰) || || '''본관''' ||[[단양 우씨]][* 문희공파(文僖公派)-부사공(府使公) 25세 용(龍) 항렬.] || ||<|2> '''출생''' ||[[1868년]] [[9월 14일]] || ||[[경상도]] [[의성군|비안현]] 정동면 교촌[br](現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 ||<|2> '''사망''' ||[[1940년]] [[5월 24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43년 6월 25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향년 71세) || ||[[경상북도]] [[선산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14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68년 9월 14일 경상도 비안현 정동면 교촌(現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에서 아버지 우지해(禹智海, 1831 ~ ?. 6. 23)와 어머니 [[선산 김씨]](1841 ~ ?. 3. 16)[* 김종복(金宗復)의 딸이다.]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1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해 하천 항해권을 탈취하는 등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 및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동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09|강원형]](姜遠馨)과 함께 일본군의 불법 침략을 규탄하는 공문서를 조선 국내 각 나라의 공사관에 발송했다. 이어 그해 8월 [[일진회]]가 조직되어 매국적인 활동을 이어나가자 이를 규탄하다가 1905년 5월 일본군 헌병대에 구속되기도 했고, 1905년 8월 한국 연해 및 내륙 하천 항행(航行)에 관한 약정서(韓國沿海及內河航行ニ關スル約定書)가 체결되자 8월 21일 당시 외부대신 [[이하영(1858)|이하영]](李夏榮)의 집에 뛰어 들어 이하영의 얼굴에 침을 뱉은 뒤 "너는 나라를 팔아 먹고도 부족하여 하천마저 팔아 먹으니 다음에는 또 무엇을 팔 것이냐?"라고 매도했다가 일본군 헌병대에 재차 [[http://db.history.go.kr/id/gj_006_c09_080_200_030|체포되기도 했다]]. 1906년 2월 28일 [[http://db.history.go.kr/id/gj_006_c10_020_250_060|석방된]] 뒤에도 대한제국 정부의 친일대신들과 일본에 대한 굴복정책을 탄핵하는 상소를 수 차례 올려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고, 1906년 4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43160&categoryId=46623|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에 가입해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이후 1907년 8월 대한자강회가 [[이완용]] 내각에 의해 해산당하고 그해 11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43224&categoryId=46623|대한협회]](大韓協會)가 새로 조직되자 이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경술국치]]를 전후해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에 [[http://db.history.go.kr/id/ma_015_0200_0090|거주하면서]]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이후 [[선산군]]으로 이주해 해평면장에 임명되었는데, 종종 선산군청에서 출두(出頭)하라는 공문을 보내오면 군청에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고 말그대로 출두(出頭), 즉 머리만 안쪽으로 들이밀며 "해평면장 우용택 출두하였소!"라고 했다고 한다. 그 뒤 [[조선총독부]]에서 각 지방에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내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내오자, 우용택은 충신은 [[이완용]], 효자는 장승원(張承遠, 1852 ~ 1917. 11. 12)[* [[장택상]] 전 [[대한민국 국무총리]]의 아버지로, 당시 [[칠곡군]]에 거주하던 친일 부호였다. [[박상진]]·[[채기중]] 등이 이끄는 대한광복회 회원에 의해 처단당했다.], 열녀는 해평면 장터 김선낭(金仙娘)[* [[기생]]이었다고 한다.]이라고 추천해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http://m.gitnews.net/view.php?idx=35391|#]] 이 일로 인해 해평면장에서 면직당했고, 이후 1940년 5월 24일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별세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의성군 출신 인물]][[분류:단양 우씨]][[분류:1868년 출생]][[분류:194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