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주 황제)] ||<-2> '''{{{#ece5b6 북주 추존 황제}}}[br] {{{+1 德皇帝 | 덕황제}}}''' || || '''묘호''' ||없음 || || '''시호''' ||덕황제(德皇帝) || || '''성씨''' ||우문(宇文) || || '''휘''' ||굉(肱) || || '''부친''' ||우문도(宇文韜) || || '''생몰''' ||? ~ 526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서위]]의 권신이었던 [[우문태]]의 아버지였다. == 우문씨 가문의 내력 == 서기 4세기 중반 [[우문태]]의 5대조때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에게 정복되었고, 그후에는 [[북위]]의 탁발씨 황실에 복속한 우문씨는 내몽골의 무천([[후허하오터시|호화호특]])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해 거기서 뿌리를 내렸다. 우문씨의 시조는 대대로 삭주 지역의 토호 족장으로 있었다. 족장 보회때 옥도장 3개를 얻었는데 거기에 '''황제새'''(皇帝璽)라는 글이 박혀 있었다. 보회는 이상했으나 하늘이 준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이라는 의미의 선비어 '''우'''와 '주군'이라는 뜻의 '''문'''을 써서 부족명 및 성씨로 삼았다.(《[[주서]]》) '''우문보회'''의 아들 '''[[우문막나]]'''는 몽골의 음산으로부터 남쪽의 요서 지방으로 이동해 선비 [[탁발부]]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9세 뒤인 '''[[우문일두귀]]'''때 선비 모용부의 영웅 [[모용황]]이 [[우문부]]를 멸망시켰는데(344) 그때 일두귀의 아들 '''우문릉'''은 [[전연]]에 투항했고, [[저족]]의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과 모용선비의 [[후연]]을 차례대로 섬겼으며, 후연에서 부마도위가 되고, 현도공에 봉해졌다. 북위의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후연의 모용보를 격파할 때 모용보의 부하였던 우문릉은 500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북위에 투항하여 도목주, 안정후가 되었다. 북위는 후연의 귀족들을 수도 평성 근처로 옮겼는데, 이때 우문릉은 무천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우문계'''를 낳았고, 우문계는 '''우문도'''를, 우문도는 '''우문굉'''을 낳았다. == 생애 == 우문굉은 우문도(宇文韜)의 아들로 북변 6진 중의 하나인 무천진 출신이었다. 옥야진(沃野鎭)의 파륙한발릉(破六汗拔陵)이 반란을 일으키자 원근에서 파륙한발릉에게 응했다. 파륙한발릉의 반란은 곧 북위의 혼란을 초래한 [[육진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파륙한발릉의 무리 중 위가호(衛可孤)의 무리가 가장 강성했는데 우문굉은 동향 사람들을 규합하여 위가호를 죽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문굉은 장남인 [[우문호(북위)|우문호]](宇文顥)를 잃었다. 우문굉은 이후 난리를 피해 중산(中山)으로 달아났다가 선우수례(鮮于修禮)에게 항복했다. 526년, 선우수례가 반란을 일으킬 때 우문굉은 선우수례와 함께 했는데 정주(定州)의 관군들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북주]]가 건국된 뒤 우문굉은 덕황제(德皇帝)로 추존되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의 추존 황제]][[분류:526년 사망]][[분류:내몽골 자치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