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虞丘進[br]우구진}}}''' || || '''작위''' ||관내후(關內侯) → 용천현오등후(龍川縣五等侯) → [br]망채현남(望蔡縣男) → 망채현자(望蔡縣子) || || '''성''' ||우구(虞丘)[* 복성이다.] || || '''이름''' ||진(進) || || '''자''' ||예지(預之) || || '''본관'''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 || '''생몰''' ||363년 ~ 422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송(남조)|유송]]의 인물로 자는 예지(預之)이다. == 생애 == 본관은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으로 363년에 태어났다. [[비수대전]]에서 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융안(隆安) 연간에 [[손은(동진)|손은]]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구진은 유유를 따라 [[손은(동진)|손은]]을 정벌할 때 참여했다. 우구진은 구장성(句章城)에 진수하며 수십 일 동안 포위되어 연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입었으나, 여요현(餘姚縣)의 아포(呵浦)에 이르러 장표(張驃)를 물리쳤고 해염현(海鹽縣)의 옛 치소와 누현(婁縣)까지 손은을 추격했다. 또한 포도(蒲濤) 어귀에서 손은과 교전을 벌이다 부상을 입었으나 손은을 울주(鬱洲)까지 추격했고 다시 석록두(石鹿頭)까지 진군했다가 해염현으로 귀환했다. 402년, 석보고(石步固)에서 [[노순]]과 20여 일 동안 대치했다. 403년, 동양군(東陽郡)에서 [[서도복]]을 물리쳤고 임송혈(臨松穴), 천강(千江), 안고(安固)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404년, [[환현]]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연국(燕國) 내사로 제수되었다. 406년, 용양장군(龍驤將軍)으로 제수되고 용천현오등후(龍川縣五等侯)에 봉해졌다. 유유가 [[남연]]을 정벌할 때 임구성(臨朐城)에서 남연의 군대를 물리쳤다. 유유가 남연을 정벌하는 동안 노순이 건강으로 핍박해오자, 맹창(孟昶)과 [[제갈장민]] 등은 [[안제(동진)|안제]]를 데리고 장강을 건너 대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우구진은 맹창과 제갈장민의 의견에 반대했으며, 유유는 우구진에게 동의했다. 우구진은 나무를 베어 석두성에 울짱을 치며 노순에 대비했으며, 파양군(鄱陽郡) 태수로 임명된 뒤 파양으로 출병하다가 오무교(五畝嶠)에 도착한다. 이때 노순이 영두(英紏)를 상요현령(上饒縣令)으로 삼고 성을 수비하자 우구진은 영두를 물리쳤다. 노순이 다시 동민지(童敏之)를 파양군 태수로 삼아 파양군을 점령하자, 우구진은 파양으로 진군하여 동민지를 물리치고 수백 명을 참수하였다. 이후 우구진은 다시 유번(劉藩)을 따라 시흥에서 서도복을 토벌해 참수하였다. 412년, 영만호군(寧蠻護軍)·심양군(尋陽郡) 태수로 제수되었고 유의를 토벌할 때 종군했다. 유의가 토벌된 뒤 태위부 행참군으로 보임되었고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제수되었다. 413년, 망채현남(望蔡縣男)에 봉해지고 식읍 500호를 받았으며, 용양장군이 더해졌다. 또한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전공을 세웠고 돌아와서 보국장군(輔國將軍)·산양군(山陽郡) 태수로 제수되었다. 뒤에 진군(秦郡) 태수로 제수되고 도독진류군제군사(都督陳留郡諸軍事)가 되었다. 420년, 유유의 4남인 우장군(右將軍) 유의강(劉義康)의 사마가 되었다. 같은 해, 유유는 [[공제(동진)|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유송의 초대 황제인 [[무제(유송)|무제]]였다. 421년,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로 옮겼다. 다음 해인 422년에 사망했다. 이때 사마휴지를 토벌한 공을 추론하여 작위가 자로 올라갔으며, 식읍 300호가 더해졌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송(남조)/인물]][[분류:363년 출생]][[분류:42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