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22_giovanni_X.png|height=125]] || || 제121대 [[란도(교황)|란도]] || → ||<#806600> '''{{{#FFF 제122대 요한 10세}}}''' || → || 제123대 [[레오 6세]] || * [[라틴어]] : Ioannes X * [[이탈리아어]] : Giovanni X * [[영어]] : Pope John X * 생몰년 : 860년 ~ 928년 5월 * 재위기간 : 914년 3월 ~ 928년 5월 요한 10세는 부제 시절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의 아내 [[테오도라]]의 눈에 띄어 볼로냐 주교, 라벤나 대주교로 서품된다. 그는 자신을 출세시켜 준 [[테오필락트]] 부부를 위해 [[루트비히 3세]] 대신 [[베렝가리오 1세]]를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올리고자 공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14년에 교황 [[란도(교황)|란도]]가 사망하자 [[테오필락트]] 부부의 지원을 받아 교황이 된다. 선출도 없이 교황이 된 데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테오도라]]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포르모소]]에 의한 성직자 서품을 인정하지 않는 등 [[테오필락트]] 부부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계속 추진 했던 것이 합리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교황이 된 후에는 이탈리아에 전초 기지를 만들어 약탈을 일삼던 [[사라센]]을 물리치기 위해 스플레토의 [[알베리크]]와 이탈리아의 여러 군주, 특히 베렝가리오의 힘을 빌렸으며 결과적으로 무력을 앞세워 [[사라센]] 세력을 이탈리아 밖으로 몰아낸다. 요한 10세는 베렝가리오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그를 이탈리아 왕으로 대관하였고 베렝가리오를 중심으로 이탈리아가 통일 되도록 후원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베렝가리오가 이탈리아 귀족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그 뒤 암살당하기에 이르러 이 꿈은 물거품이 된다. 연이어서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테오필락트]]가 사망하였고, 스플레토의 [[알베리크]]도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후원자가 연이어 사망하자 요한 10세는 위기에 몰렸는데, [[테오필락트]]의 딸 [[마로치아]]는 평소 자신의 어머니 [[테오도라]]와 염문을 뿌리고 다닌 요한 10세를 못마땅해 했으며 토스카나 후작 [[귀도(토스카나)|귀도]]와 혼인한 뒤 그의 지원을 얻어 언제든 요한 10세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에 요한 10세는 자신의 동생 [[피에트로(스폴레토)|피에트로]]를 공석이 된 스플레토 공작 자리에 앉혔고 마자르족의 후원까지 얻어 세력 균형을 맞췄다. 요한 10세는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이 맞춰진 후, 유럽 및 종교적 업무에 열심을 다하였다. 특히 [[클뤼니 대수도원]]을 후원하고, 라테라노 대성전을 재건축하였으며, 동유럽 미사 문제에 대해서도 라틴어만을 사용하는 미사 집전만 인정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하지만 926년부터 불안하게 맞춰져 오던 [[마로치아]]와의 권력 균형이 928년 [[마로치아]] 쪽의 기습에 소수 병력만 있던 교황과 피에트로[* 현장에서 신체가 몇 조각이 나도록 난도질 당했다고 한다.] 일파가 당하면서 무너졌고, 요한 10세는 폐위되고 만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감옥에서 교살 되었다는 것과 상심이 큰 나머지 급사했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요한 10세의 유해는 라테라노 대성당 입구에 매장되었다. [[분류:교황]][[분류:860년 출생]][[분류:928년 사망]][[분류:에밀리아로마냐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