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시다 요시오의 수상 경력 / 감독직''' || ||<:> {{{#!folding [ 열기 / 닫기 ] [include(틀:한신 타이거스 영구 결번)] ||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 '''[[1985년 일본시리즈|{{{#000000 1985}}}]]'''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30]]]] '''{{{#ffffff 1954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 || 1953년[br]카나야마 지로[br]([[히로시마 카프]])[br]58도루 || → || '''요시다 요시오'''[br]'''([[오사카 타이거스]])'''[br]'''51도루''' || → || 1955년[br]혼다 이츠로[br]([[주니치 드래곤즈]])[br]42도루 || ||<-5><:>[[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30]]]] '''{{{#ffffff 1956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 || 1955년[br]혼다 이츠로[br]([[주니치 드래곤즈]])[br]42도루 || → || '''요시다 요시오'''[br]'''([[오사카 타이거스]])'''[br]'''50도루''' || → || 1957년[br]이이다 토쿠지[br]([[코쿠테츠 스왈로즈]])[br]40도루 || [include(틀:한신 타이거스 감독)] }}} || ||<-2>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jiji.com/vic009-12jpp01422205.jpg|width=100%]]}}} || ||<-2><:> '''{{{#ccac00 한신 타이거스 No. 23}}}''' || ||<-2><:> '''{{{#ffffff {{{+2 요시다 요시오}}} [br] (吉田 義男)}}}''' || ||<:> '''{{{#000 생년월일}}}''' ||<:> [[1933년]] [[7월 26일]] ([age(1933-07-26)]세) || ||<:> '''{{{#000 국적}}}''' ||<:>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000 출신지}}}''' ||<:> [[일본]] [[교토]] 부 교토 시 나카교 구 || ||<:> '''{{{#000 포지션}}}''' ||<:> [[유격수]] || ||<:> '''{{{#000 학력}}}''' ||<:> [[교토]] 시립 제2 상업 고등학교(폐교로 인해 전학[* [[제2차 세계대전|전후]] 학제 개편으로 폐교되었다.])[br]교토 시립 야마시로 고등학교[br][[리츠메이칸 대학]](중퇴) || ||<:> '''{{{#000 투타}}}''' ||<:> [[우투우타]] || ||<:> '''{{{#000 신체조건}}}''' ||<:> 167cm, 56kg || ||<:> '''{{{#000 프로입단}}}''' ||<:> 1953년 || ||<:> '''{{{#000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오사카-한신 타이거스]] (1953~1969)'''[* 1953~1960까지 오사카 타이거스.] || ||<:> '''{{{#000 지도자 경력}}}''' ||<:> [[한신 타이거스]] 플레잉코치 (1969)[br]'''[[한신 타이거스]] 감독 (1975~1977, 1985~1987, 1997~1998)'''[br]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0~1995)[br]파리 대학[* 대학야구 팀이지만 [[디비시옹 엘리트]]에도 소속되어 있는 세미프로 팀이기도 하다.] 감독 (1990~1993)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3번에 걸쳐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재임하며 한신 역사상 첫 [[1985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인물. == 현역 시절 == 교토 제2 상업 고등학교 시절부터 출중한 실력으로 일찌감치 프로의 주목을 받아왔다. 종전 이후 학제 개편으로 제2 상업 고등학교가 폐교되자 야마시로 고등학교에 편입학하여 야구를 계속 했으며, 2학년 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여름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탈락했고, 이듬해엔 지역예선 결승에서 패퇴한 경력이 있다. [[파일:external/www.kcc.zaq.ne.jp/yoshida.jpg|width=500]] [[병살타]]를 처리하는 요시다(가운데). 우측 41번 선수는 [[2루수]] 카마다 미노루. 고교 졸업 후 [[리츠메이칸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1953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며 프로에 첫 발을 디뎠다. 신장 165cm로 야구선수로서는 상당히 왜소한 체구[* [[카더라]] 성 일화이지만, 요시다의 대학 재학시절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이던 하마자키 신지가 요시다에게 관심을 보이며 영입을 시도했으나 키가 작다는 것을 알고 '''"그런 꼬맹이를 데려와서 뭐해"''' 라면서 단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웃기는 사실은 하마자키 자신도 키가 154cm에 불과했다.]였지만 날렵한 몸놀림과 안정된 수비가 일품이었고 날카로운 타격으로 타선에서도 첨병대장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발도 빨라서 [[도루]]왕 타이틀을 2회 석권하는 등 매년 두 자릿수 도루는 꼬박꼬박 찍었고, 그런 활약을 바탕으로 마침내 1962년 [[한신 타이거스]][* 1961년부터 팀명 변경.]를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후 [[토에이 플라이어즈]]와의 [[1962년 일본시리즈]]에선 비록 팀의 패퇴를 막진 못했지만 5할에 가까운 시리즈 타율을 기록하면서 감투선수상을 수상했다.[* 도에이의 중심타자 [[장훈]]은 그 해 정규시즌 퍼시픽리그 MVP로 선정됐고 일본시리즈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1964년 시즌엔 0.318의 타율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할 타율을 마크했고 그 해 '''179타석 연속 무삼진'''이란 진기록을 수립하면서[* 이 기록은 1975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오가와 토오루'''가 '''180타석 연속 무삼진'''으로 경신했다.] 한신의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선 [[난카이 호크스]]에게 패배)에 기여했는데, 투고타저 시대였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또한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을 9번이나 수상했고 팀메이트인 [[3루수]] [[미야케 히데시]][* 수비는 요시다와 쌍벽을 이루는 명 3루수였고, 882경기 연속출장과 700경기 연속 전 이닝 출장이란 기록을 세운 적도 있다(이 기록은 2004년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경신했다). 그러나 1962년 9월, 시합 전 캐치볼 도중 공에 왼쪽 눈을 강타당하는 사고로 시력을 거의 잃으면서 기량이 급격히 하락했고 결국 1967년 아쉽게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2루수]] 카마다 미노루와 함께 '''사상 최강의 내야진'''을 구축하며[* 이 당시 한신의 [[투수]]들은 내야 땅볼이다 싶으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마운드를 고르며 마음 편히 다음 타자를 맞이할 준비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최고의 유격수로 이름을 남겼다. 특히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명 유격수 '''[[히로오카 타츠로]]'''와 불꽃 튀기는 라이벌 전은 그야말로 백미 중 백미.[* 이때 [[전통의 일전]] 3연전에 대해 '''첫 경기는 [[무라야마 미노루|무라야마]] vs [[나가시마 시게오|나가시마]]-[[오 사다하루|오]] 경기를 보고 그 다음에는 히로오카 vs 요시다의 명 수비를 보는 재미로 본다'''라는 말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히로오카-요시다 둘 다 서로를 가리켜 "굉장히 뛰어난 유격수다" 라고 틈만 나면 상대를 추켜세운 희한한 라이벌 관계 였다는 점이다.] 은퇴 시즌인 1969년에는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였으며, 그 해를 끝으로 17시즌 동안 '''1864안타, 66홈런, 434타점, 350도루, 타율 0.267'''의 통산 성적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 지도자 시절 == === 한신 감독 1기 === 선수생활을 접은 후 1974년까지 [[후지TV]], [[간사이 테레비]]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1975년 [[카네다 마사야스]]의 후임으로 [[한신 타이거스]] 감독에 취임했다.[* 이 당시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나카니시 후토시]] 감독과의 다소 불편한 관계로 인하여 자유계약으로 풀린 [[장훈(야구선수)|장훈]]이 요시다에게 한신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고 요시다가 단박에 OK하여 장훈이 오사카에 집까지 마련했지만, 뒤늦게 영입 경쟁에 뛰어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장훈을 내줘야 했다.] 감독으로선 특이하게도 보통 팀의 주전 선수들이 다는 등번호 1번을 달았다. 이해 홈런왕 수상으로 [[오 사다하루]]의 연속 홈런왕 기록을 저지한 팀의 주포 [[타부치 코이치]] 등을 앞세워 시즌 중반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니치 드래곤즈]]와 [[센트럴리그]]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시즌 막판에 추락하면서 3위로 마감했다. 취임 당시 "달리는 야구"를 표방한 요시다였지만 정작 팀 도루가 [[양대리그]]제 도입 이래 팀 최저 기록인 31개에 그치며 스피드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 것도 원인. 감독 첫 시즌을 마치고 팀의 주축 [[투수]]였던 [[에나츠 유타카]]를 [[난카이 호크스]]로 보내는 등[* 이 트레이드의 배경엔 요시다와 에나츠가 여러 차례 의견 차이로 대립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는 속 사정도 있다.] 대형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팀의 체질개선을 꾀했고 다음 해인 1976년, 신예 슬러거 [[카케후 마사유키]]와 에나츠와의 트레이드로 영입한 [[에모토 타케노리]] 등 투타에서 맹활약하는 에이스 선수들을 앞세워 이해 숙적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치열한 우승 경쟁 끝에 불과 2게임차로 [[센트럴리그]] 2위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승률 .615를 찍으며 꽤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7년엔 주포 [[타부치 코이치]]의 부진과 투수진 붕괴로 팀 성적이 승률 .466으로 떨어지면서 순위도 리그 4위로 하락했고, 이로 인해 요시다는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승률 .466은 한신 사상 최악의 승률이었다. 다만 바로 1년 만인 1978년 한신이 '''승률 .339'''로 작년보다 더 비참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구단 사상 최초로 [[센트럴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굴욕을 맛보는 바람에 최저 승률 타이틀은 어찌저찌 떼게 되었다. === 한신 감독 2기 === [[파일:85한신.jpg]] 1985년 한신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이 결정된 후 [[헹가래]]를 받는 장면. 이후 해설가로 일하다가 1985년 다시 한신의 감독으로 복귀[* 애초에 한신은 [[한큐 브레이브스]], [[킨테츠 버팔로즈]]를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장 [[니시모토 유키오]]를 감독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이를 거절한 니시모토가 대신 요시다를 추천한 것이 감독 복귀의 계기가 되었다.]했다. 시즌 전에는 [[랜디 바스]]의 재계약을 강력히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고, 당시까지 유망주에만 그치고 있던 포수 [[키도 카츠히코]]를 주전으로 낙점해서 개막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해 한신은 [[랜디 바스]]-[[카케후 마사유키]]-[[오카다 아키노부]]로 이어지는 [[백스크린 3연발|레전드]]급 [[클린업 트리오]]를 주축으로 한 이른바 '''[[https://ja.wikipedia.org/wiki/%E3%83%8B%E3%83%A5%E3%83%BC%E3%83%80%E3%82%A4%E3%83%8A%E3%83%9E%E3%82%A4%E3%83%88%E6%89%93%E7%B7%9A|뉴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앞세워 1964년 이래 21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시리즈 에서 [[세이부 라이온즈]]를 4승 2패로 일축하고 구단 사상 최초의 [[1985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룩하였다.[* 당시 세이부 감독은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였다. 히로오카는 이 해를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했다.] 한신 우승 당시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방 전역에서 우승의 희열을 이기지 못한 [[한신아재|한신 광팬]]들이 [[도톤보리강]]에 뛰어들고 거리의 간판과 기물, 다수의 차량이 파손되는 등 축제를 넘어 거의 폭동에 가까운 분위기로 들썩일 정도로 한신의 우승은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승 뒤 흥분한 나머지 한신 팬들에게 사랑받던 [[랜디 바스]]를 닮았다 하여 팬들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어느 통닭집]]의 [[할랜드 샌더스|호호백발 할아버지]]의 마네킹을 [[도톤보리강]]에 집어던진 뒤 타이거스의 1987~2002년의 16년간의 [[4466566664|암흑기]]가 찾아온, 이른바 '''"[[커널 샌더스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 이 때였다.] 이듬해 리그 연패를 노리며 1986년 시즌을 맞았고 중심타자 바스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타격 삼관왕]]을 석권하는 등 변함없이 맹활약 했지만 주포 카케후가 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하고 요시다는 투수기용 문제로 투수코치인 [[요네다 테츠야]], 타격 코치 보좌역 [[타케노우치 마사시]]와 대립하는 등 내홍을 일으키면서 정확히 승률 5할로 리그 3위에 그쳤으며, 1987년엔 구단 사상 최악의 승률인 '''0.331'''을 찍으며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쓴잔을 들이키고 요시다는 또다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해 요시다의 등번호였던 23번이 영구 결번이 되었다.] 다만 이 시기의 요시다는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도 불구, 언론과의 험악한 관계로 인해 우승 감독으로 대우받긴 커녕 오히려 사소한 발언도 왜곡 보도되며 피해를 보는 등 다소 억울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2번째 감독 퇴임 후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 이듬해인 1990년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겸 파리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아 1993년 까지 파리 대학 감독을, 1995년까지 프랑스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 한신 감독 3기 === 이후 1997년 세번째로 한신 감독을 맡아[* 아이러니 하게도 한신은 [[니시모토 유키오]]에게 한번 더 감독 취임을 요청했지만 역시 응하지 않았고, 1985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요시다가 한신 감독으로 재취임했다.] "Again 1985" 를 외치며 신인 [[츠보이 토모치카]],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영입해온 노망주 [[포수]] [[야노 아키히로]][* [[세키카와 코이치]]와 [[쿠지 테루요시]]를 트레이드해서 [[야노 아키히로]]와 [[타이호 야스아키]]를 영입했다.]를 주전으로 키워내고 전력외로 분류됐던 [[야기 히로시]]는 전문 [[대타]]요원으로 변신시키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투수진의 심각한 부진과 [[중심타선]][* 데려올 때마다 먹튀였던 [[외국인 선수]]들은 물론이요, 토종 중심타자인 [[신조 츠요시]], [[히야마 신지로]]도 매년 [[삼진]] 1위를 다툴 정도의 선풍기 스윙으로 일관했다.] [[공갈포]] 일변도의 타격으로 인한 득점력 침체 등으로 인해 팀 성적은 나아질 기미 없이 계속 침체된 채로 머물렀고 2년 연속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의 희생양이 되는 끝에 2년간 5위, 6위에 그치며 별볼일 없이 또다시 퇴임하고 말았다. 당시 [[4466566664]]의 비밀번호를 쓰던 한신에서 [[4466566664|가운데의 '''56''']]을 기록했다. 그나마 재취임 첫 해에 5위를 찍어서 7년 연속 최하위[* 참고로 [[NPB]] 연속 최하위 기록은 1954~1959년 [[타이요 훼일즈]], 1957~1962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6년.]라는 막장 대기록을 안 찍은 게 위안일 정도.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484승 511패 56무승부(승률 0.486)''', 한신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감독 치곤 생각 외로 승률이 다소 낮은데 한국으로 치면 [[김인식]] 감독과 거의 비슷한 성적이며, 같은 팀을 세 번에 걸쳐 지도한 점은 [[강병철]] 감독과 흡사하다.[* 단 요시다는 한신 감독 경력만 있지만, 강병철은 [[롯데 자이언츠]] 외에 [[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 감독으로도 재직했다.] 다만 1,051시합 출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역대 감독 중 가장 많은 경기를 지휘했고, 한신 감독 중 유일하게 세 번에 걸친 임기, 네 자릿수 경기 출장을 달성한 인물이다.[* 다만 이건 [[한신 타이거스]]가 과거엔 워낙에 프런트, 코치진, 선수단 3자 간의 대립과 반목이 심해서 툭하면 2~3년마다 감독들이 바뀌기 일수였던 것도 원인이다. 보면 알겠지만 요시다도 여기에 워낙 휘말렸기에 임기를 3번이나 치렀던 것.] == 감독 은퇴 이후 == [[파일:external/cdn-ak.f.st-hatena.com/20040112093139.jpg]] 현장에서 물러난 요시다는 현재까지 [[테레비 아사히]]의 해설가와 닛칸 스포츠의 객원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1992년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인 야구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0년에는 [[한신 코시엔 구장]]에 개설된 코시엔 역사관의 고문에 취임했다. 2011년 7월엔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프랑스 야구계에 공헌한 것을 기려 '''프랑스 야구, 소프트볼 연맹 명예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요시다의 애제자이자 한신의 주축 강타자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한신 타이거즈를 [[2023년 일본시리즈]]에서 38년만의 우승을 달성한 것에 대하여 제일 먼저 축하해 주었다. [youtube(rcBns4xURJc)] 자택에서 한신의 일본시리즈 제패 장면을 TV로 보며 기뻐하는 요시다. 90대로 접어든 노령임에도 아직 건강해 보인다. == 여담 == * 현역 시절 별명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우시와카마루]](牛若丸)"[* 현대의 우시와카마루라는 뜻에서 이마우시와카마루'(今牛若丸)로 불리기도 했다. 같은 시기 옆 리그의 간사이팀인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요시다와 마찬가지로 빠른 발과 괜찮은 수비력을 주무기로 삼아 활약하던 외국인 선수 [[로베르토 바르본]]도 이 별명을 얻었다. 이쪽은 [[쿠바]] 출신이라서 '''[[쿠바]]산 우시와카마루'''로 불렸다.]였고 경기 때 재빠르고 날렵한 플레이로 "나는 [[제비]](飛燕)"로도 불렸다. * 그의 조카(누나의 아들)인 타니 신이치도 야구선수 였으며, 1980년대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유격수]]로 활동했다.[* 타니는 데뷔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지만 주전 자리는 단 한 해로 끝나면서 곧바로 다른 선수들에게 밀려 출장 기회가 급감해 버렸고, 결국 명선수였던 외삼촌과는 달리 통산 100안타만 간신히 넘긴 채 은퇴했다. 은퇴 후 1991~1996년까지 킨테츠에서 코치를 역임한 후 현재는 [[킨테츠 버팔로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으로 탄생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다.] [[분류:1933년 출생]][[분류:일본의 야구감독]][[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나카교구 출신 인물]][[분류:우투우타]][[분류:내야수]][[분류:일본프로야구 영구 결번 선수]][[분류:원클럽맨/야구]][[분류:1953년 데뷔]][[분류:1969년 은퇴]][[분류:한신 타이거스/은퇴, 이적]][[분류:일본야구전당 헌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