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황제)] || '''{{{#FCE774 요비아누스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로마 제국의 전제정)] ----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4세기)]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CE774,#FCE774 로마 제국 제47대 황제}}}[br]{{{#FCE774,#FCE774 {{{+1 요비아누스}}}[br]IOVIANVS}}}'''}}}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old_Solidus_of_Jovianus,_Antioch.jpg|width=100%]]}}} || || {{{#FCE774,#FCE774 '''이름'''}}}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비아누스 [br](Flavius Claudius Jovianus) || ||<|2> {{{#FCE774,#FCE774 '''출생'''}}} ||331년 || ||[[로마 제국]] 모에시아 싱기두눔 || ||<|2> {{{#FCE774,#FCE774 '''사망'''}}} ||364년 2월 17일 (향년 33세) || ||[[로마 제국]] [[아나톨리아]] 다다스타나 || ||<|2> {{{#FCE774,#FCE774 '''재위 기간'''}}} ||{{{#000 로마 황제}}} || ||[[363년]] [[6월 26일]] ~ [[364년]] [[2월 17일]] '''(234일)''' || || {{{#FCE774,#FCE774 '''전임자'''}}} ||[[율리아누스]] || || {{{#FCE774,#FCE774 '''후임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 || || {{{#FCE774,#FCE774 '''부모'''}}} ||[[아버지]] : 바로니아누스 || || {{{#FCE774,#FCE774 '''배우자'''}}} ||[[차리토]] || || {{{#FCE774,#FCE774 '''자녀'''}}} ||바로니아누스 || || {{{#FCE774,#FCE774 '''종교'''}}} ||[[기독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율리아누스]]가 죽고, 군대의 추대로 제위에 오른 로마제국의 황제. 약 8개월간 재위를 지켰는데,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 암살된 듯하다. == 생애 == 331년 신기두눔(현재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바로니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근위대장을 지냈으며, 요비아누스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라 근위대에 들어간 뒤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 되었다. 이후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자 종군하였으며, 율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군대에게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당시 요비아누스도 종군했기 때문에 황제가 되자마자 요비아누스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던 군사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시아 황제와의 협상이 잘 돼서 페르시아 군의 추격을 받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도시 [[앙카라]]와 티그리스 너머의 로마 영토를 [[할양]]하고, 아울러 [[아르메니아 왕국]]의 종주권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조건으로 이루어진 퇴각은 당시에 대단한 불명예로 간주되었으므로, 이는 요비아누스가 빠르게 인망을 잃는 원인이 되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와 [[마술]]을 믿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은 [[테오도시우스 1세]] 때가 아니라 사실상 요비아누스의 치세 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덕분인지 죽어서 [[성당]]에 묻혔다. 요비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재정립하기 위해 굴욕적인 강화라는 무리수를 둬 가면서 빠르게 퇴각했으나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퇴각 도중에 다다스타나[* 안퀴라(지금의 [[앙카라]])와 [[이즈니크]] 사이에 있다.]라는 곳에 차린 자신의 천막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중독사였는데, 독버섯을 잘못 먹었다는 말도 있고 가스([[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요비아누스 후임으로 제위를 차지한 발레티아누스 1세, 발렌스 형제가 요비아누스의 큰아들 바로니아누스의 눈 하나를 멀게 해 제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요비아누스의 아내는 살아남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자신도 암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당대에도 [[암살]]이라고 추정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요비아누스의 치세가 이어진 기간은 겨우 8개월에 불과했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그리스도교를 강력히 옹호하고 힘을 실어준 그의 인생이 이름과 대립한다는 것이다. 요비아누스란 이름은 Iovis에 라틴어의 명사화 접미사 -anus를 붙인 것인데, 뜻을 풀이하면 요비스(Iovis)에게 속한 자, 또는 요비스의 사람이다. 요비스는 로마의 전통신 [[유피테르]](Iuppiter)를 가리키는데, 사실 유피테르란 명칭은 '아버지 요비스(Iovis pater)'란 호칭이 단축된 것이다. '유피테르에게 속한 자'란 이름을 받은 사람이 로마 황제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편들고 그리스-로마의 전통종교를 억압하였으니 참으로 알궂은 일이다. [[분류:로마 제국의 기독교 신자]] [[분류:로마 황제]] [[분류:로마 제국 집정관]] [[분류:4세기 집정관]][[분류:331년 출생]] [[분류:364년 사망]] [[분류:독살된 인물]][[분류:베오그라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