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회원수정)] [include(틀:촉서)] 廖立 생몰년도 미상 [목차] == 소개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촉나라의 문관. 자는 공연(公淵). 무릉군 임원현 출신. [[유비]]가 형주목으로 있을 때 종사로 임명되었으며, 30세가 되기 전에 장사태수로 임명된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면서 제갈량이 형주를 지키고 있을 때 [[손권]]이 사자를 보내 우호를 표방하면서 누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을 도울만 하냐고 묻자 [[제갈량]]은 [[방통]]과 요립을 언급하며 요립을 높게 평가했다. 215년에 유비가 촉을 차지하자, 손권은 이제 촉을 얻었으니 형주를 반환하라고 사자를 보냈는데, 유비는 양주를 얻으면 형주는 상여하겠다면서 말을 이래저래 돌리자, 이에 손권은 분노한다. 그는 곧 [[여몽]]을 시켜 장사와 영릉 그리고 계양을 빼앗게 하였는데, 당시 장사태수였던 요립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성도로 달아나지만 유비는 그를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심하게 문책하지 않고는 그를 파군태수로 임명했다. 당시 유비군의 영릉태수 [[학보]] 같은 경우는 여몽의 거짓말에 속아 항복했으니 수비할 의지조차 없었던 요립보다는 낫다. 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시중이 되었다가 223년에 [[유선(삼국지)#s-1|유선]]이 즉위하자 장수교위로 전임되었으며, 이 때 요립은 자신의 재능이 제갈량 다음에 간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한직에 임명되어 엄연히 탁고대신의 위치에 있었던 [[이엄#s-3|이엄]]의 아래에 있게 되자 처우에 불만을 품게 된다. 후에 [[이소#s-2|이소]]와 [[장완]]이 오자, 요립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그 말이 '''선제인 유비를 비롯해''' 중앙관리들을 욕하는 말들로 장사태수로서 '''손권에게 장사를 빼앗길때 자신의 과오는 잊은채 비방을 쏟아냈다.''' >군대가 마땅히 먼 곳으로 나가려 하는데([[제갈량의 북벌]]을 가리킴), 모든 벼슬아치는 이 일을 살피면 좋을 것이다. 옛날 선제는 한중을 취하지 못하고 달려가 오나라 사람들과 함께 남쪽의 세 군(강하, 장사, 계양)을 다투어 기어이 삼군을 오나라 사람들에게 줘버리고, 벼슬아치와 선비들을 헛되이 수고하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 바 있다. 이미 한중은 망해 버렸을때, [[하후연]]과 [[장합]]이 파(巴) 깊숙이까지 깊게 들어오게 했다가 거의 익주를 잃어버릴뻔했다. 나중에 한중에 다다랐을 때 [[관우]]는 죽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으며 [[상용]]은 복패(覆敗)하여 공연히 한 지방을 잃었다. 무릇 관우가 용맹한 이름을 믿고 의지하여 법도 없이 군대를 지휘하고 직관에 따라 돌발스럽게 행동하여 전후에 수많은 군사가 초상나게 된 것이다. 상랑, 문공 등도 똑같이 평범하고 속된 인간이다. 문공은 치중으로서 기강이 없고 [[상랑]]은 과거 [[마량]] 형제를 받들어 성인이라고 일컬었기에 지금 장사가 되었고 본디 능히 이치에 맞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랑 [[곽유지]]도 사람들을 따를 뿐이지 국가의 큰일을 함께 족할 사람이 못 되는데 시중이 되었다. 지금 세력은 약해지고 있다. 이 세 사람에게 이런 일을 하게 한 것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왕련은 풍속에 흐르는 자로서 성급히 권세를 믿고 함부로 돈이나 물건을 거두어들여 제멋대로 백성이 피폐해지게 한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 유비와 관우에 대한 평가를 제외하더라도 그들이 한일을 보면 요립이 나머지를 함부로 깔 제재는 되지 못했다. [[문공]]은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상랑은 마속을 비호했던 일로 제갈량에게 면직되었으나 오히려 재야에서 고전연구를 하며 책을 손에서 놓지않고 80세가 넘어서까지 서적의 오류를 바로잡고 제자를 받아들여도 세상일을 논의하지 않고 고전의 일만을 다루어 위로는 정치를 담당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아이들과 청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존중했다. 상랑전에 따르면 당초, 상랑은 젊었을 때 비록 문학을 광범위하게 섭렵했지만 평상시의 품행이 바르지 못했고, 관리가 된 이후에야 능력을 칭찬받게 되었다고 하니 관리로서의 능력을 의심받을 여지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상랑은 제갈량으로 부터 보병교위가 되었고 왕련이 죽자 승상장사를 겸임하였고,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러 갈때는 후방의 일을 맡아 처리했을 정도로 관리로서 유능했다. 또 상랑이 마량형제들을 칭찬했다고 까는데 마량은 분명 칭찬받을만한 기재가 맞았으며 [[이릉대전]] 당시에도 유비의 명을 충실히 따르다가 사망한 충신이었고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 역시 뛰어난 선비로서 평가했다. 마속 역시 1차북벌 이전 남만정벌까지는 촉망받는 인재였던 것이 사실이다. 또 마속의 경우엔 [[장완]] 등도 아까운 인재라 하여 비호했으나 제갈량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라 하여 큰 잘못을 범한것을 두고 보지 않고 군율에 따라 처리했던 것이다. 상랑 이외에도 마량형제들을 준걸로 본 인물은 얼마든지 있었고 이로서 마씨 형제들은 당시 [[백미]]라 불린 마량 외에도 모두 준걸로서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마씨오상]]으로 불릴정도로 명성이 있었는데 요립이 1차북벌 이후 죄인을 비호한 상랑의 행적을 비판했다면 모르겠으나 요립의 비방은 1차북벌 전에 죽은 이소를 만나 떠든것이므로 정황상 그 이전, 유비의 죽음 직후로 봐야 하는만큼 아직 1차북벌이 벌어지기 전에 단지 그들 형제를 칭찬했다고 까는것은 오히려 요립이 명성이 있는 사람들을 아무나 닥치는대로 비난하기 위해 떠들었다고 봐야 한다. 곽유지는 [[촉한사영]]인 비의, 동윤과 함께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다 하였고 성정이 항상 온순하며 화해로워 정한 인원을 채울뿐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초국선현전에 따르면 인물과 학식에 의해 당대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왕련]]은 당대 제갈량이 생산성을 높이는데 중점을 둔 소금과 철의 이익금을 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이로인한 이익이 매우 많아져 국가의 재정 상태를 도왔다. 또 이때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속관으로 임명했다. [[여예]], [[두기]], [[유간]] 등은 마침내 모두 높은 관직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왕련에 의해 발탁된 결과였다. == 제갈량의 탄핵 == 그 말을 들은 장완과 이소는 이 말을 제갈량에게 그대로 전하자 제갈량은 이에 표를 올렸고, 요립은 서민으로 강등되어 문산군으로 쫓겨난다. 당시 제갈량이 올린표는 다음과 같다. >장수교위 요립은 자신을 존대하고, 선비들을 평가하며 국가에서는 현명하고 달통한 인물을 임용하지 않고 평범한 속된 사람을 임명하였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며, 또 만인을 인솔하는 자는 모두 소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황제를 비방하고 여러 신하들을 헐뜯고 명예를 훼손시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의 병사들은 훈련을 통해 정예가 되었으며 대오는 조직화되고 군령을 준수한다고 말하자, 요립은 머리를 들고 지붕 끝을 보며 분연히 안색을 바꾸어 말하기를, '무슨 말할 가치가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양이 무리를 어지럽히면 해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요립은 높은 지위에 기대고 있으니, 보통 사람 이하는 그의 진위를 식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립이 얼마나 주변인들과 주군인 유비를 까고 다녔는지 배송지가 붙여넣은 [[제갈량집]]에 나온 제갈량이 올린 표의 추가 부분에선 '''제갈량이 요립의 오만함과 불충을 조목조목 까고 있을 정도다.''' 손권에게 요립의 재능을 칭찬한 이가 제갈량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갈량은 처음엔 요립의 재능을 높게 봤지만 갈수록 이런 태도에 실망을 많이 했던 듯. 특히 이 탄핵표에선 익양대치 당시 장사태수로 있을때 '''요립이 장사를 수비조차 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놓은채 도망갔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이걸보면 유비가 요립을 용케 용서해줬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 또 제갈량이 요립을 장수교위에 둔 이유도 밝혀지는데 요립보다 공이 많은 [[이엄]]도 경에 올리지 못했는데 그보다 못한 요립을 그 이상으로 올릴수 없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이쯤되면 제갈량이 계속 요립을 참아주면서 진작에 짜르지 않은게 용하다 싶을 정도, 아마도 처음엔 본인이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함부로 자르기는 뭣했을 수도 있다. >요립은 선제를 받드는데 있어 충효의 마음이 없었고 장사를 지킬 때 성문을 열어 적을 맞이하였으며 파군을 다스릴 때는 어리석어 그 일을 저열하게 처리했습니다. 대장군을 따를 때면 비방하고 욕했으며 선제의 영구를 지킬때는 칼을 빼들고 그 옆에서 사람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에 보편적으로 직호를 증가시킨바 요립은 잇따라 장군이 되었는데 신의 면전에 대고 말하길 "내가 어찌 마땅히 장군의 가운데 있겠는가! 나를 경(卿)에 봉하도록 표를 올리지 않고 오교(五校, 장수교위)에 상당하게 하다니!"라 하였는데 신이 답하길 "장군이라는 것은 대비(大比, 3년마다 하는 관리의 고과)에 따르는 것이고 경(卿)에 이르러서는 정방(正方, 이엄)도 아직 경(卿)이되지 못했네. 또한 마땅히 오교에 있어야 하는것이네."라 하였는데 이로부터 불만을 가지고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요립은 자기가 제갈량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이런 불만을 토로한게 아니다. 마땅히 자신의 재능과 명성이 제갈량 다음이라고 자부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제갈량 다음의 2인자가 되어야 하는데''' 한직에 임명되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엄 등의 아래에 위치하게 되자, 불만스러워 했다. 당시 제갈량의 위치가 촉한에서 어땠는지 능히 짐작이 가능하게 한다. 이에 유선이 조서를 내리니 >"삼묘(三苗)[* [[사죄]]인 공공, 단주, 곤, 삼묘 중 하나.]가 정치를 어지럽히자 유우(有虞, [[순]])씨가 추방시켰는데 요립은 광혹하나 짐은 차마 형벌을 내리지 못하겠으니 속히 불모의 땅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이후 요립은 직접 처자를 데리고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언젠가는 제갈량이 자신을 다시 부를 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렸는데,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눈물을 떨구며 탄식하길, >나는 끝내 [[오랑캐|좌임]](左袵)[* 오른쪽 옷깃을 왼쪽 옷깃 위로 여미는 것으로 오랑캐임을 뜻한다.]으로 생을 끝마치겠구나! 라고 했다. 선황제를 비방하고도 살아남은 것만 해도 다행인데 제갈량이 다시 부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보면 보통 자존심이 큰게 아닌 듯. 후에 [[강유]]가 문산을 통과할 때 그의 집을 들렀는데, 요립은 의기가 쇠하지 않았으며, 그의 논의도 진정 자연스럽다고 칭찬했다. 요립은 그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고 그의 처자식은 그가 죽자 촉군으로 돌아왔다. == 기타 == 요립이 공격한 사람들 중에선 촉의 경제관료인 왕련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제갈량과 요립의 경제관 차이일 수도 있다. 알다시피 제갈량 치하 촉한의 견직업과 야철업과 저염업은 국가의 주도하에 상당히 발전하여 국가경제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염철 산업과 그 판매는 원래 그만한 자본과 노동력이 있는 지방의 토호와 대상인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산업이다.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 피폐하게 했다는 요립의 주장은 사실 이런 부유한 백성들을 상대로 했던 말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전한시기에도 똑같이 염철을 국가에서 관리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할때 원래 이런 이득을 얻던 지방의 토호나 호족들을 옹호하는 논리로 국가가 백성들과 이익을 경쟁하여 국가가 이득을 챙기려든다는 여민쟁리(與民爭利)의 논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제나라의 재상 [[관이오|관중]]부터가 시행한 정책으로 스스로가 관중에 빗대어 관중을 본받는 경제정책을 시행한 제갈량 입장에선 당연히 시행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이 이 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한 중앙정부는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 제갈량은 촉의 재원을 충분히 이용하고 관리하여 생산품질을 높이면서 중앙의 국고수입을 높이고자 과감한 조치를 시행했는데 직물을 관리하는 관청을 만들고 직접 비단의 품질과 개량을 통해서 촉의 비단인 촉금(蜀錦)을 천하에서 경쟁할 상대가 없는 고급품으로 만들었고 자수(刺繡)를 발전시켰으며 소금과 철을 국영으로 전환하고 이것을 관리하는 정부기관을 설치하여 중앙에서 직접 통제했다. 이런 관리와 더불어 이후 남중정벌로 인한 각종 물품의 유입은 북벌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되었고 북벌을 시행하면서도 촉한의 경제 지표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제갈량은 단순히 염철의 국가주도 외에도 소금과 철의 품질을 높여 이익을 증대하고 해당물품을 구입하는 이들의 만족을 도모했다. 이렇게 해서 촉한 중앙정부의 재정수입은 크게 증가하였으며 국고도 충실해졌다. 이렇게 나라의 재정을 강화시킨 것으로 인해 유언 통치시기부터 나타난 풍조인 촉 지방의 토호, 호족들을 약화시키는 중앙집권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는 제갈량이 식민(息民), 즉 백성들의 요역과 세금을 경감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또 유비와 제갈량은 객관을 많이 세우고 역참제도를 재정비했는데 이는 촉한의 도로와 운송을 원활케하여 상공업과 교통운수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즉, 국가가 직접 상업을 진흥케 하는 방편으로 개입하는것을 원칙으로 삼고 아울러 그것들이 국가 인민의 생계에 중요한 구성 요소로 농업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반면 요립은 국가가 민간의 생산을 자율에 맞겨 백성들에게 휴식을 두어야 한다는 여민휴식(與民休息)의 입장에서 부유한 백성들, 토호들의 이익을 중앙정부가 함부로 그에 관련된 세금을 거두어 빼앗는다고 생각하여 이런 의견을 제시했을 공산이 있는 것이다.--그냥 요립이 나 말고 다른 놈들은 다 병X이라는 의미로 아무거나 가져와서 막 깐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별 언급이 없다가 제갈량이 죽을 때 "나는 평생 좌임(서민)으로 살아야겠구나!"라며 탄식하는 장면만 나온다. == 미디어 믹스 == || [[파일:external/kongming.net/478-Liao-Li.jpg]] || || 삼국지 11 || ||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915.jpg|width=400]] ||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제갈량이 방통과 엮어 칭찬을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장송]], 방통 급으로 못생긴 일러스트를 가지고 있다. 능력치는 정치만 70대 정도고 나머지는 쓰레기급 문관. 삼국지 1편, 2편, 4편, 5편, 9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삼국지 3]] 한글판에서는 유입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삼국지 9]]에서는 짤렸다가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4/무력 19/지력 68/정치력 79/매력 25에 특기는 상업, 반목, 혼란 3개. 상업셔틀로나 쓰라는 소리. [[삼국지 12]]에서는 [[휴고]]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해 입을 벌린 일러스트로 나왔다. 정황상 나만한 인물이 제갈량 다음가는 직위에 있어야 하거늘 왜 이런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냐며 투덜거리는 일화를 묘사한 걸로 보인다.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15/지력 76/정치력 78에 특기는 경작, 수집, 보수, 변설, 병기로 나름대로 준수한 내정요원.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1, 교섭 1. 전수특기는 상업이고 전법은 속공명령이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22, 무력 15, 지력 69, 정치 76, 매력 25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0, 지력이 7, 정치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소심, 오만, 주의는 명리,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안행, 전법은 혼란, 매성, 친애무장은 없고 혐오무장은 왕련, 제갈량이다. [[삼국전투기]]에도 출현하는데 오장원 전투(7)에 나온다. 제갈량이 죽자 나를 알아봐 줄 인물은 제갈량밖에 없는데 그가 죽었다면서 울분에 토한다. 누구를 [[변희재|패러디]] 했냐하면 그 모습만 보면 금방 눈치 가능할 것 같다. [[분류:촉한의 인물]]